▲ 감타래를 어루만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손자라도 쓰다듬는 양 흐뭇하게 보인다. | ||
산천을 지배하던 빛들은 시들고, 마음마저 허허롭지만 전북의 들머리를 이루는 완주 땅은 아직도 제 자리 걸음인 듯 가을이 한창이다. 소설이 코앞인 이번 주엔 미처 떠나지 못한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완주로 가보자. 완주 동상 감 마을에서 대아·동상저수지를 돌아 잘 늙은 절집 화암사까지 가는 길은 짧으면 한나절로 충분한 늦가을 나들이. 여기에 완주 8미 중 하나인 붕어찜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호남고속도로 익산IC에서 나와 봉동읍내를 벗어나면 늦가을과 마주친다. 고산읍에서 성림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고산천을 따라 달리는 비포장 길. 늦가을 완주의 아름다움 중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이 천변 끝, 동성산 자락에 있는 ‘고산자연휴양림’이다.
황금빛 이깔나무 숲 속에 숨은 듯 자리한 휴양림은 늦가을이 소담히 밟히는 낭만의 공간. 발 밑이 푹신할 만큼 낙엽이 그득하다. 굳이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늦가을 숲의 온기를 호흡하며 천천히 걷기 좋다. 휴양림을 벗어나 732번 지방도로를 타면 길은 새재 너머 대아저수지로 이어진다.
겹겹이 싸여 있는 산줄기 사이로 마을을 끼고 있는 대아호는 만수면적 2.4㎢의 제법 큰 저수지. 그 절반 넓이쯤의 동상호와 물줄기가 서로 이어져 있어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포천의 산정호수처럼 산 중턱에 걸쳐 있어 대아저수지는 산세 또한 빼어나다. 낮이면 첩첩한 산그늘이 호수로 내려앉고, 새벽이면 모노톤의 담백한 실루엣을 따라 물안개가 자욱히 피어오른다. 낮게 깔린 물안개에 비쳐드는 새벽 햇살은 아예 홍시처럼 붉어 가슴을 저민다.
두 저수지를 끼고 도는 호반길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생각보다 먼 길이다. 하지만 새재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서 신월리, 사봉리를 거쳐 율치고개를 넘은 후, 송광사가 있는 대흥리, 수만리, 음수동을 거쳐 다시 동상저수지 대아저수지가 합수하는 지점에 이르는 동안 만나게 되는 산촌 풍경이 지루함을 덜어줄 만큼 아름답다.
집집마다 달고 앉은 주홍빛 감타래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대아-동상저수지 호반길에선 누구나 속도를 늦추고, 차창을 내린 채 달려보는 낭만을 누릴 수 있다. 코끝으로 스미는 알싸한 늦가을 바람이 달착지근한 곶감 냄새를 풍기거든 잠시 멈춰 가을을 맛보는 것도 좋다.
본격적인 감 마을 여행은 대아저수지와 동상저수지가 합수하는 지점, 신월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에 앞서 먼저 들를 곳이 있다. 바로 대아저수지 중턱, 산천리에 있는 대아수목원이다.
▲ 동상곶감으로 유명한 용연마을. 아낙네들이 곱게 깎아서 매달아 놓은 감 타래가 주홍전구마냥 환하다. | ||
정상에 오를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면 열대식물원 관람이 제격이다. 식물들이 뿜어내는 푸릇푸릇한 색채가 계절을 거슬러 오르는 듯 신비롭다.
길은 다시 저수지를 끼고 도는 아름다운 감 마을, 동상면으로 굽이진다. 늦가을이면 집집마다 땡감을 꿰어 곶감을 만든다. 요즘은 대형창고에 쇠파이프를 걸친 현대식 곶감 건조장도 등장했다지만 이곳에선 아직까지 나무로 만든 옛날식 건조대가 많이 남아 있어 산촌의 정취가 오롯이 살아있다. 수확이 끝나고도 아직 주렁주렁 노란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자연을 위한 배려, 까치밥이다.
감마을로는 제법 규모가 크다는 신월리 용연마을부터 들린다.
이곳저곳에서 곶감 만들기가 한창이다. “원래 한로 무렵 감을 따서, 상강부터 곶감을 깎기 시작해 11월 중순까지 깎아 감덕(감타래)에 거는데, 올해는 시작이 좀 늦었어요.” 마을 아낙네 여럿이 모여 앉아 갈고리같이 휘어진 칼로 감을 깎고, 감꼭지를 능숙하게 줄에 끼워 타래에 건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반가워하면서도 손놀림은 쉬지 않는다.
하지만 동상곶감 자랑에 사위는 삽시간에 왁자지껄한 장터로 변한다. “동상곶감은 씨 없는 고종시지. 농약도 안 치고 비료도 안 주는 야생 무공해 감이지. 대부분 손으로 깎아 무르지 않지….”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조목조목 자랑하는 냥이 어린아이처럼 순박하다. 사실 대아-동상저수지를 따라 도는 동상 감 마을 여행은 길을 달리면서 만날 수 있는 쉬운 풍경이 아니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 걸어야 울타리 안팎에 걸린 주홍빛 감타래와 조우할 수 있다.
곶감이 타래에 걸린 채 꾸덕꾸덕 마르는 기간은 감을 타래에 걸기 시작한 때로부터 40~60일 후(12월 말)까지. 처음엔 밝은 노란빛을 띠다가 보름쯤 지나면 전구를 켠 듯 환한 주홍빛을 발한다. 당분이 하얗게 배어 나오는 12월 말보다 만지기만 해도 터질 듯 말캉말캉해지는 11월 말이 곶감을 맛보기엔 더 좋은 때다. 11월20일 이후 이곳에 가면 인심 좋게 건네는 홍시는 물론 저렴한 가격에 즉석에서 구입해 맘껏 맛볼 수 있다.
▲ 화암사 우화루(위)와 대아수목원. | ||
여기서도 환한 불을 켠 듯 밝은 주홍빛의 감타래는 줄을 잇는다. 좁은 포장길이 끝나는 숲길 끝이 화암사 주차장이다. 차를 이곳에 두고 등산로와 흡사한 숲길을 20여 분 걸어야 절 마당에 설 수 있다. 낙엽에 묻혀 길조차 희미해져 버린 ‘길’. ‘개를 데리고 오지 마세요. 절 개가 죽임’이란 경고문구가 씌어있는 화암사 표지판조차 없었다면 길을 찾아 헤맸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화암사 가는 숲길은 옅은 바람에 낙엽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인적 드문 적막 속이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 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마음이 이끄는 길”이라 했던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가파른 산길을 20여 분 올라 드디어 길 끝, 벼랑 위에서 화암사를 만났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잘 늙은 절 한 채”라 했던 화암사. 늙은 절집이 주는 맑은 기운이 몸 가득 퍼진다.
‘비가 꽃이 되어 흘러내린다’는 누각 우화루에서, 국내 유일한 하앙구조의 극락전에서, 그리고 늙은 노간주나무 아래에서 뒤미처 따라올 겨울과 못내 아쉬움에 남은 가을이 혼재된 계절의 틈새를 본다. 오래돼 참 좋은 절집에서 감 마을 완주의 늦가을 여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