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알알이 박힌 노을비단 ‘황홀’
▲ 마량리 동백꽃은 크기가 작고 빛깔이 붉기로 유명하다. | ||
봄꽃이 그리워 길을 달렸다. 서해바다 마량리 포구. 춘백(春柏)이라 불리는 4월의 동백꽃이 마량리 동백정에 탐스럽게 매달렸다. 눈이 시리도록 붉디붉은 작은 종들의 향연. 나무마다 넘칠 만큼 핀 동백꽃은 그 앞 바다로 불기둥처럼 떨어지며 세상을 물들이는 낙조와 더불어 상춘객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충남 서천 마량리는 바다를 향해 갈고리처럼 툭 튀어나온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손바닥 만한 작은 어촌이 자기 이름을 알린 것은 이곳의 지형적 특성과 동백꽃 때문이다.
서해바다에 있으면서도 특이하게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마량리는 동짓날을 전후로 50여 일 동안 바다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한적한 포구가 겨울 동안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시즌이 지나면 이번에는 동백꽃이 인파를 불러들인다. 3월 중순께 시작하여 4월 말까지 피어있는 마량리 동백꽃은 다른 어느 곳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자태를 뽐낸다.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이곳의 5백 년 수령 ‘마량리 동백숲’은 바다를 바라보는 조그만 언덕 위에 있다. 바로 바다와 인접한 서쪽은 바람이 강하여 몇 그루만이 남아 있고, 내륙을 향한 동쪽 사면에 70여 그루가 분포하고 있다. 치자나무과에 속하는 동백나무는 키가 7m까지 자라는 난대성 상록활엽수. 하지만 이곳의 동백나무는 강한 바닷바람 때문에 키가 2m를 넘지 않는다. 대신 몸집이 옆으로 퍼져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나이에 걸맞게 어른 10여 명이 팔을 이어야 둘러쌀 만큼 폭이 넓다.
이곳 동백나무에는 마량리 사람들을 지키는 서낭신이 깃들어 있다. 적어도 바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런 신앙이 있다. 5백여 년 전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던 바다 마을 사람들은 파도에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는데, 이곳에 동백나무를 심고부터는 그런 일이 더는 없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동백나무를 신성시하며 지금도 정월 초하루부터 사흘간 언덕 위 동백숲에 올라 무사안녕과 풍어를 빌며 제사를 지낸다.
▲ 숭고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서해 일몰. 아래는 춘장대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지프차. | ||
동백숲 정상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동백정이라고 이름 붙은 이 누각은 주변의 동백나무와 해송에 둘러쌓여 더 없는 운치를 자아낸다.
동백정에서 내려다 보는 서해, 그 중에서도 해질녘 노을의 경관은 무한대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 향기 그득한 정자에 앉아 서해 일몰을 보노라면 마음마저 평온해지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떨어지는 해와 함께 한 점 남김 없이 바다 뒤로 사라지는 기분이다.
서서히 떨어지던 해는 어느덧 바다에 불처럼 붉고 뜨거운 기둥을 하나 세우며 온 세상을 그 빛으로 물들인다. 아름답다기보다 숭고하다고 해야 할까. 여지껏 속해 있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계가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그 순간을 붙잡아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연속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해는 지척에 떠 있는 섬, 오력도 뒤로 점점 그 모습을 감춘다. 하늘도 그 붉은 태를 벗고 감청빛으로 슬슬 변한다. 사람들은 아쉬움에 완전히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를 쉬 떠나지 못한다.
여름에 분주해지는 곳은 마량리 동백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춘장대 해수욕장이다. 하지만 여름을 기다릴 것도 없이 오프로드 마니아들로 해변이 가득하다. 고운 찰흙처럼 밀도가 높아 차가 달려도 바퀴가 빠지지 않는 백사장 위로 자동차를 달리는 맛이 제격이다.
백사장은 상당히 넓다. 길이가 1km에 가깝고, 썰물 때는 종심이 5백m 가량 된다. 4륜 오토바이 ATV에서부터 지프차량들이 마음껏 내달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마량리 동백숲 언덕의 중층 누각 동백정.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일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무창포에 봄나들이 온 가족들(아래). 중간오른쪽 네모 사진은 무창포 주꾸미축제 모습. | ||
이곳은 마음껏 조개를 잡을 수도 있다. 물이 빠진 백사장에는 조개가 지천이다. 뿐만 아니라 삼림욕하기도 그만이다. 춘장대해수욕장은 활처럼 휜 모래사장을 따라 아카시아와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아카시아가 피는 4∼5월, 그리고 해송이 진한 향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여름날 이곳의 숲을 거닐면 혼탁한 정신이 맑고 투명해진다.
자연이 주는 그 선물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일까. 해송숲 사이에 설치한 가건물들이 흉물스럽다.
춘장대 바로 옆은 남촌마을. 갯벌이 아름다운 작은 어촌이다. 춘장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잠시 들러 그 풍광에 취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서해안은 꽃보다 맛이 먼저 피는 곳이다. 봄꽃은 남으로부터 올라오지만, 봄맛은 북에서부터 내려간다. 요즘은 간자미와 주꾸미가 제철이다. 마량리 동백숲 오가는 길에 봄 맛에도 취해보자.
요즘 많이 올라오는 어류가 간자미와 주꾸미다. 홍어사촌쯤 되어 보이는 간자미는 홍어와 똑같은 모양이지만 그 크기가 훨씬 작아서 값이 싸다. 잘게 썰어 고춧가루 도라지 미나리 오이 등을 넣고 버무린 무침과 간단한 양념을 얹은 찜, 야채와 무를 넣어 끓인 탕이 그만이다.
요즘 주꾸미가 맛이 좋은 이유는 산란철이 오뉴월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마량리에서는 ‘동백 주꾸미축제’가 열리는데(4월8일까지), 마침 인근 다른 해안에서도 주꾸미를 주제로 한 축제가 같은 시기에 열려 서해안은 온통 주꾸미 잔치판이다.
서천 남쪽 군산에서는 3월31일까지 ‘주꾸미축제’가, 서천 북쪽인 보령 무창포해수욕장에서는 4월17일까지 ‘고동 주꾸미축제’가 열리고 있다. 예부터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 할 만큼 봄철 먹는 주꾸미는 맛이나 영양을 최고로 쳤다. 초고추장에 찍어 회로 먹거나, 무침, 전골 등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IC-21번 국도 비인 서천 방면 약 3.5km-춘장대 이정표 따라 약 8km.
▲숙박:마량리 해변의 민박이나 춘장대해수욕장의 여관들이 한갓지다. 광남식당 민박 041-951-3013, 서산회관 민박 951-7677, 해맞이파크 952-3531, 동백정별장 952-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