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데이’ 인기 넘어 청와대 청원으로 번진 경구피임약과 콘돔 광고 차별 논란
D 제약의 경구피임약 광고 화면, 아이돌그룹 걸스데이의 멤버 유라가 광고모델이다. D 제약 유튜브 사이트 캡처
2018년 2월 12일 장 아무개 씨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평소 영화관을 자주 가는 편이다. 영화 시작 전, 유명한 아이돌그룹 멤버의 여성피임약 광고를 5번째 봤다”며 “하지만 저는 이제껏 한 번도 한국에서 콘돔 광고는 보지 못했다”라는 내용의 청원글을 올렸다.
장 씨는 “콘돔은 85%의 높은 피임효과뿐만 아니라 피임약과 달리 부작용이 없고 성병예방을 위해서도 필수인 제품이다”며 “부작용 많은 여성피임약은 광고하고 콘돔 광고는 안 된다? 콘돔사용 장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2월 21일 현재 장 씨 글에 대한 추천 수는 약 1만 8000건을 돌파했다.
경구피임약에는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포함돼 있다. 경구피임약은 호르몬을 조절해 몸이 임신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배란을 막거나 정자의 착상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콘돔은 피임이나 성병예방의 목적으로 성교시에 남자의 음경에 씌워 사용하는 고무제품이다.
경구피임약과 콘돔의 주된 목적은 ‘피임’이다. 하지만 같은 목적과 달리 광고 현실은 정반대다. 경구피임약 광고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D 제약은 최근 경구피임약 ‘X이보라’의 스크린과 TV 광고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I 제약은 젊은 커플이 나오는 영상으로 경구피임약 ‘X이리스’를 온라인으로 홍보해왔다. 경구피임약 광고 시장은 치열해 보인다.
반면 콘돔 광고는 전무하다. 콘돔은 ‘의료기기’로 분류되어 있다. 의료기기법에 따르면, 성병 예방과 임신 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도 의료기기에 속한다. 콘돔 업체가 방송, 인쇄, 인터넷 매체에 광고를 하기 위해서 식품의약안전처와 의료기기광고사전심의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들 기관의 심의 기준이 엄격한 탓에 콘돔 광고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콘돔 업계 관계자들은 “특히 심의위의 심의 기준이 엄격하다”고 입을 모았다. 콘돔 판매 업체 ‘이브콘돔’ 관계자는 “광고에 사용할 수 있는 문구가 한정돼 있다. 연예인들이 등장한 소주 광고는 무분별하게 나오지만 콘돔은 광고가 힘들다. 소주는 청소년들이 구입할 수 없는 물건이다. 반면 콘돔은 구입 가능하다. 콘돔에 대해서만 광고 심의가 까다롭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최대 콘돔 생산업체 유니더스 관계자도 “경구피임약 TV 광고를 보면, 객관적인 심의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던 형용사적 표현이 많이 보인다”며 “예를 들어 의료기기 심의위에 ‘편안한 착용감’이란 문구를 냈더니, 근거자료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런데 ‘편안한 착용감’은 객관적인 자료로 증명할 수 있는 문구가 아니다”고 밝혔다.
의료기기광고사전심의위원회의 ‘의료기기 위반 광고 해설서’. 심의위 홈페이지 캡처
실제로 의료기기광고심의위의 ‘의료기기 위반 광고 해설서’를 살펴보면, 업계 관계자들의 토로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심의위는 ‘000을 위한 혁신적 패키지’란 콘돔 광고 문구에 대해 “거짓, 과대 광고를 했다”면서 ‘혁신적’이란 키워드 삭제를 권고했다. ‘센스만점 필수 아이템’이란 문구 역시 “절대적 표현을 사용했다”며 ‘필수’란 키워드를 지우도록 했다.
이들 광고 문구와 D 제약의 경구피임약 광고를 비교하면, 심의위의 ‘잣대’가 애매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서 아이돌그룹 ‘걸스데이’ 멤버 유라가 등장한 경구피임약 광고 영상엔 “누구를 만날지 그 사람과 어떤 사랑을 할지 난 내가 선택해, 사랑도 완벽해야 하니까”라며 “나의 선택은 X이보라, 99% 피임효과 X이보라로, 실수 없이 걱정 없게”라는 문구가 나온다.
심의위의 기준에 따르면, ‘실수 없이’와 ‘걱정 없게’라는 문구 역시 과장 광고가 될 수 있다. 경구피임약 X이보라도 완벽한 피임방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상 말미에 “X이보라를 사용한 뒤 첫 1년 간 원치 않는 임신을 경험한 여성의 퍼센트를 비교한 표에서 일반적 사용 시 8%, 완벽한 사용 시 0.3%의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경험하였다”고 작은 글씨의 문구가 나오는 까닭이다.
D 제약의 경구피임약 광고 화면, 아이돌그룹 걸스데이의 멤버 유라가 광고모델이다. D 제약 유튜브 사이트 캡처
이에 대해 의료기기광고심의위 관계자는 “콘돔은 의료기기다. 콘돔의 목적은 피임과 성병 예방이다. 그것과 관계없는 성적인 표현은 광고 문구로 쓸 수 없다”며 “의료기기법 시행규칙에 따라 낙태를 암시하거나 외설적인 도안을 사용한 광고는 할 수 없다. 이에 해당하는 표현에 대해 수정을 권고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콘돔 광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3년 당시 국내에 진출한 영국 레킷 벤키저의 콘돔 브랜드 ‘듀렉스’는 대대적인 TV 광고로 돌풍을 일으켰다. 의료기기광고심의위 관계자는 “당시 듀렉스는 스토리보드와 콘티를 제출했고, 심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듀렉스의 콘돔 광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사회적 반발이 심했고, 부정적인 의견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서 광고를 일찍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듀렉스라는 브랜드에 악영향을 준 것”이라고 밝혔다. ‘성인용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듀렉스가 더 이상 광고를 진행할 수 없었다는 의견이다.
듀렉스의 콘돔 케이블 TV 광고 화면. 유튜브 캡처
이런 인식은 콘돔 광고가 넘어야할 또 하나의 ‘산’으로 자리잡았다. 콘돔 광고를 위해서는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도 필요하다. 간행물윤리위는 도서·잡지·만화·전문신문의 유해성을 심의하는 기관이다.
간행물윤리위 관계자는 “여성가족부 장관이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고시한 품목이 있다. 콘돔은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고시돼 있다. 내용과 관계없이 유해 매체물로 결정이 되기 때문에 지면에 광고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는 일반 콘돔이 아닌 성적 자극을 위한 특수형 콘돔만을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한 상태다. 청소년들이 현재 편의점에서 일반 콘돔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까닭이다.
업계 일각에선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일반 콘돔 광고 심의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간행물윤리위 관계자는 “장관이 고시한 품목이기 때문에 무리해서 광고할 이유가 없다”고 답변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콘돔 광고의 ‘장벽’이다. 방심위 관계자는 “방송 광고가 송출된 이후에 민원이 들어오면 심의를 한다. 하지만 콘돔만을 엄격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밝혔다. 식약처, 의료기기광고심의위,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 콘돔 광고라도, 방심위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광고 규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배경이다.
익명을 요구한 콘돔 업체 관계자는 “우리나라 낙태율이 OECD 국가 중에 가장 높지만 피임율은 낮은 나라다. 콘돔은 가장 높은 피임률을 담보하는 피임방법이다. 경구피임약 광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콘돔에 대해서는 엄격한 이중 잣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에선 정부가 여성피임약 광고에 관대한 것을 두고 피임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하거나 성행위 자체를 은밀한 행위로 치부하는 등 가부장적이고 낡은 전통의식이 여전히 사회에 만연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