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닮은 ‘마음 산책’
▲ 요셉성당. | ||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위치한 성지 ‘배론’(舟論)은 한국 천주교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곳이다. 배론은 치악산 동남쪽의 구학산(9백85m)과 백운산(5백82m) 등 준봉들에 둘러싸인 산골 마을로 예부터 숨어 살기 좋은 곳이었고,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일찍이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1866년 병인박해 전에는 아랫배론, 중담배론, 윗배론 등 6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배론 마을로 들어가는 긴 골짜기는 지금도 맑고 깨끗하다.
배론 성지의 파릇한 잔디는 아직 봄 처녀처럼 싱그럽지만 아침저녁의 공기는 선선한 가을에 와 있다. 특별한 절차나 입장료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이곳은 경건하면서도 한편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이다. 성지 입구를 관통하는 계곡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황사영 백서 토굴부터, 신학당, 순교자의 집, 언덕 위의 최양업 신부 묘소까지 많은 유적지들이 형성돼 있고, 왼쪽은 대성당과 소성당, 로사리오의 길 등이 모여 있다.
▲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 | ||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여러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사영 백서 사건’의 무대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요셉 신품학당’이 이곳에서 설립됐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황사영이 백서(帛書)를 쓴 토굴’ 앞에서 주말 산책 나온 제천의 나들이객을 만났다. 가족이 모두 불교 신자라고 소개하는 한 부부는 아이들한테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우리 정은이는 부처님이나 하느님께 기도해도 안 잡아가지. 그런데 옛날에는 기도한다고 사람들을 잡아가고 그랬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이 토굴 속에 숨겨준 거야.”
신유박해(1801) 당시 배론 마을 사람들이 굴을 파서 천주교 지도자였던 황사영을 숨겨주었고 그는 천주교의 박해사실을 적은 백서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중국으로 백서를 가지고 가던 사람이 붙잡혀, 황사영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 배 모양을 형상화한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왼쪽)과 로사리오 동산의 조각상. | ||
요셉 신품학당 맞은편에는 한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의 성당,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이 지어져 있다. 2천여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은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하여 배 모양으로 설계·시공되었는데, 들어서는 순간 위압감보다는 포근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조용한 성당 뒤편에서는 성모마리아상에 머리를 조아리는 소녀가 서 있었는데 이내 기도문이 울려 퍼졌다.
“저는 커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되게 해주세요. 아멘.”
아이의 천진난만한 기도에 피식 웃음이 난다. 이처럼 주말에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꺼리들이 많이 생겨난다. 부지런히 다니고 천천히 볼 수 있는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제천방면)-서제천IC-38번국도(충주방향)-5번국도(원주방면)-봉양면 구학리 배론 성지
★문의: 043-651-4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