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8년 걸쳐 1014경기 ‘연속 출장’…김형석은 집단항명 참여하며 기록 대신 동료 택해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매일같이 출전을 준비하고 전 경기 빠짐없이 그라운드에 나서는 선수들이 존재한다. KBO가 공식 시상하는 기록도 아니고, 다른 성적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도 못하지만, 이들은 ‘전 경기 출장’을 그 어느 상보다 값진 훈장으로 여긴다. 전 경기 출장은 선수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서다. 기본적으로 꾸준한 활약과 자기 관리가 뒷받침돼야 매 경기 감독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경기를 다 뛴다는 것은 곧 자신이 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라는 의미와 같다.
올해는 많은 선수가 체력 조절과 페이스 관리에 애를 먹을 만한 시즌이다. 정규시즌이 역대 가장 빠른 3월 24일에 시작한다. 시즌이 한창 무르익을 8월에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으로 인해 리그가 중단된다. 한국에 남는 선수에게는 휴식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는 국가대표로 경기를 치른 뒤 다시 리그에 복귀해 시즌을 이어가야 한다. 휴식을 취한 선수도 그들 나름대로 다시 경기 감각을 찾느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험난한 일정이다. 과연 올해는 어떤 선수가 전 경기 출장에 성공할 수 있을까.
1014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갖고 있는 최태원 kt 코치가 1000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세웠을 당시 모습. 연합뉴스
# 역대 전 경기 출장 선수 227명…1998년 17명으로 최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36시즌 동안 총 227명의 선수가 한 시즌 전 경기 출장에 성공했다. 연 평균 6.3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프로야구 초창기엔 지금보다 경기 수가 확연히 적었다. 80경기가 열린 1982년엔 6명, 100경기가 치러진 1983년과 1984년엔 각각 4명과 9명이 전 경기에 출장했다.
126경기 체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는 전 경기 출장 선수 수가 시즌 상황에 따라 큰 폭으로 달라졌다. 그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인 해는 1996년. 이전까지 5명 안팎을 유지하던 숫자가 갑자기 두 배 많은 10명으로 늘었다. 최초로 두 자릿수 인원이 전 경기 출장을 달성했고, 한화와 LG를 제외한 전 구단에서 전 경기 출장 선수가 나왔다. 해태 김종국과 홍현우, 현대 박재홍, 롯데 김응국, 삼성 양준혁, OB 정수근이 그 안에 포함됐다. 쌍방울에선 김광림, 김호, 박경완, 최태원까지 무려 4명이나 전 경기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영광스러운 결과지만, 반대로 주전 대체 전력이 거의 없었던 쌍방울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1997년에도 1996년과 거의 비슷한 9명이 전 경기 출장에 성공했다. 쌍방울에서 김호, 조원우, 최태원까지 3명이 나왔고, 해태(김종국, 홍현우)와 삼성(양준혁 이승엽)이 2명씩을 전 경기에 내보냈다.
1998년엔 역대 최다 기록까지 세웠다. 무려 17명이다. 쌍방울은 또 다시 김기태, 심성보, 조원우, 최태원까지 4명이 전 경기에 출장했고, 삼성(김한수, 양준혁, 이승엽)과 OB(김실 심정수 타이론 우즈)도 각각 선수 3명이 126경기를 다 뛰었다. 여기에 현대 김경기와 전준호, LG 유지현과 이종열, 해태 홍현우, 한화 송지만, 롯데 마해영을 포함해 역대 유일하게 전 구단에서 전 경기 출장 선수가 배출됐다. 경기 수가 132경기로 늘어난 1999년에도 전 경기 출장 선수 수는 9명으로 건재했다.
다만 2000년부터 5명으로 확 줄었다. 처음으로 133경기를 치르기 시작한 시즌이다. 이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연속 8명의 전 경기 출장 선수가 나오면서 선수들이 133경기 체제에 익숙해지는 듯했지만, 경기 수가 다시 126경기로 축소된 2005년엔 오히려 6명으로 줄었다. 급기야 2010년(133경기)에는 KIA 안치홍, LG 조인성, 넥센 강정호까지 단 3명만 전 경기 출장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최소 인원이자 108경기가 열린 1988년의 역대 최소 인원 기록과 타이였다. 2011년에도 4명에 그쳤고, 2012년엔 다시 3명까지 줄어 최소 인원 기록을 한 번 더 썼다.
그러나 2013년 경기 수가 128경기로 복원되면서 다시 전 경기 출장 선수 숫자는 7명으로 늘었다. 롯데에선 손아섭, 전준우, 황재균까지 세 명이 모든 경기를 뛰었고, 넥센에선 박병호와 김민성이 성공했다. 삼성 최형우, NC 김종호도 전 경기 출장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NC의 1군 진입으로 9개 구단 체제가 되면서 대결 상대가 없는 한 팀은 불가피한 휴식기를 갖게 됐는데, 오히려 그 기간이 선수들의 체력을 관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았다.
2017시즌 신인으로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넥센 이정후. 그는 부친 이종범과 함께 최초의 ‘신인 전 경기 출장 부자’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넥센 히어로즈 홈페이지
# 신인과 외국인 선수 전 경기 출장은?
신인이 전 경기에 출장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일단 1군에서 한 자리를 꿰차는 것 자체가 어렵고, 1군 엔트리에 남는다 해도 풀타임 첫 시즌을 부상이나 슬럼프 없이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치른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서다. 실제로 전 경기 출장에 성공한 선수 227명 가운데 신인은 단 12명에 불과했다. 세 시즌에 한 명꼴로 겨우 나왔다는 얘기다. 심지어 그 12명 가운데 10명은 모두 1990년대에 몰려 있다.
1983년 MBC 이해창이 그해 열린 100경기를 모두 소화하면서 포문을 연 뒤 1990년부터 신인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0년 태평양 김경기, 1991년 쌍방울 김호, 1992년 삼성 동봉철, 1993년 해태 이종범 순으로 이어졌고, 1994년엔 LG 서용빈과 유지현이 사상 처음으로 한 팀에서 두 명의 신인 전 경기 출장 선수를 배출하는 역사를 썼다. 1995년 롯데 마해영에 이어 1996년엔 해태 김종국과 현대 박재홍이 나란히 신인으로서 전 경기를 뛰었다. 1997년엔 LG 이병규(9번)가 전 경기 출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명맥이 뚝 끊겼다. 리그를 뒤흔들 만한 걸출한 신인 선수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리그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인 선수가 1군에서 적응하기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지난해 넥센 이정후의 전 경기 출장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종범 MBC SPORTS+ 해설위원의 아들인 이정후는 고졸 신인이던 지난해 넥센의 주전 외야수로 한 시즌 144경기를 모두 치렀다. 1997년 이병규 이후 무려 20년 만에 신인 선수가 전 경기에 나서는 명장면을 선사했다. 전 경기 출장에 성공한 역대 신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경기 수를 소화한 선수이기도 하다. 심지어 1993년 전 경기에 나선 아버지와 함께 역대 최초로 ‘신인 전 경기 출장 부자’로 기록됐다. 이정후 스스로도 이 기록에 자부심이 크다. 역대 신인 최다 안타 기록까지 경신하며 신인왕을 품에 안았지만, 지난해 가장 의미 있는 수확으로 ‘전 경기 출장’을 꼽았을 정도다.
반면 전 경기에 출장한 외국인 선수는 신인 선수보다도 적다. 역대 5명에 불과하다. 외국인 선수가 거의 무조건 주전 자리를 보장받는 점을 고려하면 더 초라한 숫자다.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첫 해 한국에 온 1998년 OB 타이론 우즈가 126경기를 모두 뛴 게 처음이었다. 이후 132경기를 치른 1999년에는 한화 댄 로마이어와 롯데 펠릭스 호세가 전 경기에 나섰다. 2000년에는 현대 톰 퀸란(133경기)이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다음 타자가 나오기까지는 7년이 더 걸렸다. 현대 클리프 브룸바가 2007년 126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이후 11년간 전 경기 출장 외국인 타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동안 대부분의 팀이 외국인 타자보다는 투수를 선호했던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세 명으로 늘어나면서 외국인 타자를 한 명씩 보유할 수 있게 된 2014년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 구단에서 뛴 외국인 타자 39명 가운데 전 경기 출장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1998년 126경기에 출전하며 용병 최초로 전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OB 타이론 우즈. 연합뉴스
# 연속 시즌 전 경기에 출장한 ‘철인’들
전 경기 출장에 성공한 선수에게는 대개 ‘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만큼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2년, 3년씩 연속으로 기록을 이어간다면 더 그렇다.
원조 ‘악바리’는 MBC 김인식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부터 1987년 10월 3일 사직 롯데전까지 606경기에 연속 출장했다. 실업야구 시절부터 활약하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입문한 선수라 연속 경기 기록이 중단되던 시점엔 이미 34세의 베테랑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를 기억하는 관계자들은 “만약 김인식이 고교를 졸업한 시점부터 프로에서 뛸 수 있었다면 엄청난 연속 경기 기록을 썼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이 기록은 OB 김형석이 깼다. 김형석은 1989년 9월 24일 인천 태평양과의 더블헤더 제2경기부터 1994년 9월 4일 군산 쌍방울전까지 622경기에 연속으로 빠짐없이 나섰다. 원조 ‘미스터 OB’로 불리면서 간판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쌍방울전 이후 벌어진 OB 선수단의 집단 항명에 참여하면서 팀을 이탈했다. 기록과 동료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동료를 택했고, 결국 자의에 의해 기록이 끊겼다.
그런 김형석의 기록을 훌쩍 넘어선 주인공이 바로 최태원 kt 코치다. KBO 리그가 인정하는 진짜 ‘철인’ 중의 철인이다. 최 코치는 쌍방울 시절이던 1995년 4월 16일 광주 해태전부터 SK 시절이던 2002년 9월 8일 인천 현대전까지 1014경기에 연속으로 나섰다. 단연 따라올 자가 없는 최장 기간이다.
철저한 몸 관리와 강한 정신력, 출중한 기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록이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 연속 전 경기 출장 선수에 이름을 올렸고, 무려 8년에 걸쳐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기나긴 여정을 소화하면서 기량과 체력 저하가 동시에 찾아와 결국 1014경기에서 연속 경기 출장을 중단했지만, 여전히 다른 선수들이 넘볼 수 없는 기록이다.
이후 KIA 이범호(615경기)와 kt 황재균(618경기)이 각각 한화와 롯데 시절 꾸준히 새로운 기록에 도전했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범호는 기록을 이어 나가던 2008년 6월 4일 광주 KIA전에서 경기 후반 교체 멤버로 대기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폭우로 7회 강우콜드게임이 선언되면서 경기가 허무하게 종료됐다. 연속 경기 출장도 그렇게 중단됐다. 이범호는 최근 선수 생활의 가장 큰 ‘한’으로 이 순간을 꼽기도 했다. 황재균은 발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해 결국 기록 연장을 포기해야 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진짜 철인’ 칼 립켄 주니어, 3001경기 연속 출장…25분간 기립박수 받기도 메이저리그엔 이름보다 ‘아이언 맨(The Iron Man)’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선수가 있다. 칼 립켄 주니어다. 메릴랜드주 출신인 그는 1981년 고향팀 볼티모어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31일을 시작으로 매일같이 메이저리그 타석에 서기 시작했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빅리그 그라운드를 하루도 빠짐없이 지켰다. 결국 1995년 9월 6일 2131경기째 연속으로 출전하면서 뉴욕 양키스의 ‘철마’ 루 게릭이 보유하고 있던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넘어섰다. 립켄 주니어가 타석에 들어서자 경기장을 꽉 메운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려 25분간 박수를 보냈다.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았던 장면이다. 칼 립켄 주니어. 사진 출처=MLB 공식 홈페이지 그 후에도 립켄 주니어의 기록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6년 6월 16일에는 일본의 기누가사 사치오가 보유하고 있던 세계 최장기간 기록(2215경기 연속 출장)을 넘어섰다. 연속 경기 출장을 시작한 지 16년여가 지난 1998년 9월 19일 뉴욕 양키스전까지 무려 2632경기에 연이어 출전해 새 역사를 아로 새겼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1998년 9월 20일 볼티모어 구단은 “립켄 주니어가 오늘 밤은 ‘근무’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선수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는 당시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제 때가 된 것 같다”고 선언했다. “야구는 언제나 팀 게임이고, 항상 나 자신보다 팀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며 “내 출장 기록에 관심이 집중되는 동안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다. 이제 여기서 포커스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립켄 주니어는 수비와 체력 부담이 큰 유격수로 뛰면서 여러 차례 부상을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최장 기간 기록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더 박수를 받았다. 단순히 출장만 한 게 아니라 성적도 좋았다. 빅 리그 통산 3001경기에서 홈런 431개를 때려내면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격수로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선수로 남기도 했다. 수비력도 뛰어나 두 차례 골든 글러브도 수상했다. 모든 면에서 역사로 남을 만한 인물이었다. 립켄 주니어는 은퇴하던 2001년까지 21년 동안 볼티모어에서만 뛰었다. 메이저리그에 흔치 않은 ‘원 팀 맨’이다. 볼티모어는 은퇴 후 그의 등번호 8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는 2007년 무려 98.5%의 득표율을 얻어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