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삶, 그 허망함과 애잔함
루비의 마을 모곡으로 가는 트럭 안에서.
모곡 가는 길 대신 책을 읽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 스티븐스는 생애 첫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영국의 한 저명한 가문의 대를 이은 집사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던 당시의 유럽사회, 진정한 영국 신사의 가문을 섬기던 그는 철저하고 품위 있는 ‘위대한 집사’였습니다. 그는 사생활과 사랑도 포기하고 충직하게 그 저택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날 같이 일하며 사랑했으나 떠나보낸 켄턴 양의 편지를 받습니다. 노년에야 그녀를 찾아가는 6일간의 여행길에서 그는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자신이 평생 섬기던 분의 부조리한 이면을 알게 되고, 인생의 황혼녘에야 자신이 어떤 것을 희생하며 살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헌신의 삶 끝에 오는 허망함과 애잔함. 그러나 남은 날에도 새로운 아침이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가문에는 위대한 집사가문이 같이 있습니다. 세상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진정한 신사를 돕는 일. 그 헌신을 최고의 선으로 삼던 당시 집사들의 생애가 이채롭습니다.
샨 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디셈버 농장의 여행객들과.
인도차이나에는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이 있습니다. 미얀마, 태국, 라오스의 경계가 함께 하는 곳입니다. 한때 이곳은 쿤사의 조직이 전세계 마약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던 곳입니다. 지금은 커피와 차 생산지로 바뀌었습니다. 쿤사가 밀림의 게릴라에서 버젓하게 왕국의 수장으로 되기까지에는 참모장 장수천(Chang Su Chen)이 있었습니다. 삼국지의 유비가 제갈량을 얻었듯이 ‘쿤사의 제갈량’으로 부릅니다. 장수천은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 당시 고립되어 쿤사와 만나게 됩니다. 그는 국민당 군대의 장교로 쿤사와 결합하여 군사훈련을 정비하고, 쿤사를 논리적으로 무장시켜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들의 지도자로 부상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쿤사의 참모장에 만족했고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 20년간 쿤사의 조직은 적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쿤사는 우토라는 젊은 사령관을 기용하며 장수천의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1993년 장수천은 불안한 앞날을 내다보며 은퇴를 허락받아 대만으로 떠납니다. 나이가 회갑을 지났습니다. 그후 3년 뒤 쿤사는 믿었던 우토의 배신으로 요새를 점령당합니다. 쿤사는 버마정부에 항복하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요구합니다. 미국에 범죄자로 인도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섭니다. 그는 그 조건으로 20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버마의 주요도시에서 루비광산 등의 사업을 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2007년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73세의 나이였습니다.
인도차이나의 골든 트라이앵글은 미얀마, 태국, 라오스의 경계로 한때 전세계 마약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던 곳이다. 사진은 미얀마 쪽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인 켕퉁의 시장에서 꽃 파는 여인. AP/연합뉴스
작품 속 주인공 스티븐스를 생각하며 삶과 헌신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마약왕국 쿤사를 번성케 한 장수천의 헛된 헌신도 뒤돌아보게 됩니다. 제 자신 안에도 긴 강물처럼 흘러간 헛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지지하고 어떻게 헌신하며 살 것인가. 후회스런 현실 저 반대편의 삶이 더 나을 것인가. 마침내 6일간의 여행을 끝낸 스티븐스가 켄턴 양을 만나고, 켄턴 양이 대답합니다.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 이 자리라고. 지금 가진 현실이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