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전 지사 사직하면서 김지은 씨도 자동 면직…고용형태 안 바뀌면 ‘미투’ 외쳐도 공염불
여비서와 자신이 만든 연구소 여직원을 성폭행한 의혹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3월 8일 오후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최근 활발한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전여옥 전 의원은 “여의도에는 수많은 안희정이 있다”면서 “‘안 전 지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그를 뛰어넘는 프로페셔널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과거를 떠올리며 (미투를 당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쉴 틈 없이 돌리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전 의원에게 정치권 성추문과 관련해 직접 목격하거나 들은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더 이상의 답변은 거부했다.
정 아무개 국회 비서관은 실명으로 자신의 피해사실을 공개했다. 정 비서관은 “장난처럼 시작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반복됐다. ‘뽀뽀해달라’ ‘엉덩이를 토닥토닥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부터, 상습적으로 제 엉덩이를 스치듯 만지거나 팔을 쓰다듬고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전화해 ‘앞에 있는 여자 가슴이 니 가슴보다 크다’라는 음담패설까지 부적절한 신체 접촉과 발언이 계속 됐다”고 주장했다. 가해 당사자로 지목된 국회 보좌관은 폭로 다음 날 면직 처리됐다.
정 비서관은 당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당사자에게는 항의도 해보고, 화도 내봤지만 소용없었다. ‘동생 같아서 그랬다’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놨다”면서 “사무실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성희롱을 할지도 모르는데 항상 녹음기를 켜놓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증거 수집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제기를 하면 진실공방으로 번질 뿐이었다”고 말했다.
정 비서관이 당시 일했던 의원실은 여성 의원이었다. 도움을 요청했다면 여성의 편에서 도와주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의원님은 충분히 도와주셨을 분이지만 국회의원이 수사기관처럼 진위를 가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의원님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 비서관이 물꼬를 트면서 정치권 여성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아직까진 잠잠하다.
일요신문은 국회 여성 보좌진 30여 명을 대면 접촉해 피해사례를 수집하려 해봤지만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한 보좌진은 “다른 언론사에서도 많이 찾아오시는데 누구라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또 다른 보좌진은 “잠시 시간을 달라”며 망설였지만 오랜 고민 끝에 “쉽지 않을 것 같다”며 증언을 포기했다.
한 보좌진은 “많은 여성 보좌진들이 미투 운동에 공감하고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맞다. 가벼운 성희롱 등은 국회에서 피해사례가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실명을 내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좌진은 “당내 여성 보좌진들끼리 조만간 자리를 갖기로 했다”면서 “딱히 미투 때문에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미투 이야기가 주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향후 대응도 논의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익명이 보장되는 페이스북 국회 게시판인 여의도 옆 대나무 숲에는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의 피해사례가 올라오고 있다. 한 보좌진은 “다른 남자 보좌진들은 퇴근시키고 자신만 남게 해 일을 시키는 상급자가 있었다”면서 “커피를 타오라고 시켜서 갖다주면 껴안고 키스하려고 했다”고 폭로했다.
또 다른 보좌진은 “지속적인 성추행 사실을 수석 보좌관에게 보고했더니 ‘네가 40살쯤 되면 웃으면서 생각할 수 있을 거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면서 “이후 어떤 용기도 더 낼 수 없었고,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한 보좌진은 몇 년 전 아무개 비서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녹취와 문자 기록 등을 가지고 있고 사건 직후 해바라기 센터에 달려가 기록을 남겨두었지만 그 비서관의 인맥이나 영향력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피해사례가 많음에도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 보좌진은 대나무 숲을 통해 “업무망만 접속해도 출입 기자단의 휴대전화와 이메일 주소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언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으면 대나무숲에 글을 올렸겠느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보좌진은 “국회에도 미투 바람이 불었지만 권력형 성범죄, 권력형 갑질이 사라지겠느냐”면서 “오히려 의원들은 미투의 교훈을 통해, 보고서도 보았다 하지 않는 듣고서도 듣지 않았다하는 보좌진을 더욱 선별해 채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요신문과 만난 한 보좌진은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성추문이 만연한 이유에 대해 고용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보좌진은 “국회뿐만 아니라 정치권 정무직은 임명권자가 마음대로 고용하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 또 정치권은 좁아서 한 번 내부고발자로 찍히면 재취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약점이 없는 정치인이 없는데 누가 내부고발자를 밑에 두고 싶어 하겠나”라고 말했다.
일례로 충남도청 측은 안 전 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 씨를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안 전 지사가 사직하면서 김 씨도 자동면직 처리 당하고 말았다. 정치권 정무직들이 얼마나 취약한 고용형태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앞서의 보좌진은 “요즘 일반 직장에서는 보기 힘들 텐데 의원이 차에서 내릴 때 수행비서가 달려 나가 차문을 열어주는 조직이 국회다. 우리나라 어느 직장보다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곳이 여기인데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위에 항의할 수 있겠나. 국회에서 인권센터를 만든다고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앞서 정 비서관 역시 “많은 보좌진들이 생계형 보좌진이다. 의원실을 옮길 때조차 같이 일한 직원들, 특히 함께 일한 상급자의 평판은 다음 채용 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보좌진 생활을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법적 절차를 밟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앞서의 보좌진은 “현재 보좌진 9명 중 일부라도 공채로 뽑아 각 방에 배정해서 견제와 감시 역할을 맡기거나 의원이 보좌진을 해고할 때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 외부 기관에서 심사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보좌진은 “선거가 끝나면 챙겨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보좌진 고용이 그 방법 중 하나다. 그 수를 줄이고 공채를 뽑자고 하면 동조하는 의원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나도 내 아이디어가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정치권이 이번 기회에 기득권을 내려놓고 근본적인 개선책 마련에 나서야 되는데 결국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