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19] ‘귀한 몸’ 사냥개와 ‘애물단지’로 전락한 코끼리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태종 8년 10월 27, 28일)에는 왕과 세자가 외국의 사신단이 머무르는 태평관에 가서 명나라 사신들에게 사냥개를 한 마리씩 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사신들이 사냥개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 사냥개를 얻어 가면 본국에서 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sillok.history.go.kr
해마다 사냥철이 다가오면 전국 각지의 수령들이 왕에게 사냥개와 매를 진상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왕은 저화(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돈)나 내구마(궁에서 기르는 말)를 하사하기도 했다. 사냥을 좋아하던 연산군 시절에는 궁궐 내에서 사냥개들이 조회 때 함부로 드나들어, 의정부에서 사냥개를 풀어놓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는 일(연산 8년 2월 5일)까지 빚어졌다. 연산군은 군을 사열할 때 사냥개 10마리를 어가 앞에 내세우도록 하명한 적도 있었다.
지금의 공무원들이 근무 시간에 골프를 치다 지탄을 받는 것처럼, 사냥에 몰두하는 관리들의 처신이 도마 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사냥개를 키워 강무장(수렵장)에서 몰래 사냥하던 고을 수령이 적발되는가 하면, 조선 초의 문신 박초는 “수군이나 육군의 장수들이 매와 사냥개를 다투어 사육해 날마다 사냥만을 일삼는다”며 군대를 부리어 사냥하는 것을 금지시켜 줄 것을 왕에게 상서(세종 12년 12월 20일)하기도 했다.
귀한 몸으로 대우 받은 사냥개와는 달리 애물단지로 전락한 동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코끼리다. 조선에 처음 코끼리가 들어온 것은 태종 11년(1411년)의 일로, 일본 국왕이 진상한 것이었다. 왕은 코끼리를 사복시(말과 가마를 맡아보던 관아)에서 기르도록 했는데, 날마다 네댓 말의 콩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자신을 놀리던 사람을 해치는 일이 빚어지면서 코끼리의 ‘귀양살이’가 시작된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처음에는 코끼리를 전라도의 섬에 내려보내 방목했는데,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 덕분에 코끼리는 다시 육지로 귀환하게 된다. 당시 관찰사는 “코끼리가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왕에게 보고했고(태종 14년 5월 3일), 이를 불쌍히 여긴 왕이 육지에서 키울 것을 하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코끼리의 수난사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딱히 이득이 되는 게 없는 데다 워낙 먹어치우는 양이 많다 보니, 후일 전라도 관찰사는 장계를 올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번갈아가며 키우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코끼리는 각도를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종 시절, 충청도 관찰사의 아래와 같은 건의에 따라 코끼리는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코끼리가 섬에 발이 묶여 있었던 것과 흡사하게,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국가가 정한 시간적 규율에 묶여 있었다. 바로 야간 통행금지가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매일 밤 2경(밤 9~11시 사이)에 종을 28번 쳐서 통행을 금지했고, 다음날 5경(새벽 3~5시)에 큰 쇠북을 33번 치고 성문을 열어 사람들이 통행하게 했다. 이는 주로 밤에 벌어지는 도적질과 방화 등을 막기 위한 조치로, 통행금지 시간에는 순라군이 궁궐과 거리를 순찰하도록 했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면 법전에 따라 엄히 다스리도록 했는데, 신분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랐다. 당상관과 대간(臺諫)은 구사(종친과 공신에게 나누어주던 관노비)를 가두고, 3품 이하는 직접 가둔다는 게 그 골자다. 그런데 특권층인 ‘로열패밀리’와 관료의 잘못을 노비가 대신하도록 한 이러한 불평등한 법전마저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듯하다. ‘성종실록’ 성종 20년 6월 2일의 기록에 따르면 왕이 이처럼 한탄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요즘 순군(통행금지)을 범하여 갇힌 자는 모두 미천한 자이고 당상관이나 조사(조정의 신하)가 순군을 범한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범한 자가 없어서이겠는가. 단지 고하지 아니한 것이다. 법을 설정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