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자 확인 회피부터 양육비 전가까지’ 발뺌하는 아빠들 철퇴 나서야...재정 부담에 정부-국회 모두 난색
2018월 2월 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미혼모를 위한 히트 앤드 런 방지법을 만들어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 A 씨는 “미혼부가 지급하는 양육비 부족과 자녀 양육에 대한 무관심은 미혼모를 경제적으로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3월 14일 현재 이 글에 대한 추천수는 9만 8439명으로 4위를 기록했다.
A 씨는 미혼부의 책임 강화를 위해 ‘히트 앤드 런 방지법“을 제안했다. 그는 “덴마크에서는 미혼부가 미혼모에게 아이를 위해 매달 약 60만 원 정도를 보내야 한다”며 “미혼부가 돈을 보내지 않으면 정부가 아이 엄마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준다. 그 이후에 정부는 아이 아빠의 소득에서 세금으로 원천징수를 해버린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국내 미혼모 수는 미혼부보다 두 배 이상 많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기준 미혼모는 2만 3936명, 미혼부는 1만 1000명이었다. 미혼부모는 법적으로 미혼이면서 18세 이하 자녀를 양육하는 이들을 말한다.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엄마’들이 ‘아빠’들보다 많다는 뜻이다.
미혼모가 많아도 미혼부가 양육 책임을 기피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청원자 A 씨가 언급한대로, 우리나라에서 ‘미혼부’가 양육 책임을 방기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정책연구원이 2010년 양육 미혼모 727명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와 8명에 대한 심층 면접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이 아버지로부터 양육비 지원을 받는 경우는 전체 응답자의 4.7%에 불과했다.
유미숙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사례 팀장은 “개방적인 문화 때문에 동거 등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면서 임신은 상존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 남성들이 많아졌다”며 “부모는 미성년 자녀를 성년까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 남성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성별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이 아이를 키우는 비율이 훨씬 높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는’ 남성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남성들이 무책임한 행태를 보인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미혼모 쉼터’의 한 회원은 3월 5일 “이제 열 달된 딸이 있는데 하는 짓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임신 초기 당시 아이 아빠가 낙태를 종용했기 때문에 저는 숨어 버렸다. 이제는 아이 아빠한테 나서기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벼랑 끝’에서 양육 부담을 홀로 떠안은 미혼모들이 태반이다. 최근 한국여성재단의 ‘양육 미혼모 모자가정 건강지원사업 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미혼모 중 직업이 있다고 응답한 인원은 전체 51%였다. 이 중 대부분은 비정규직으로 10명 중 8명 이상(84%)이 월소득 100만 원 미만으로 나타났다. 앞서의 미혼모 쉼터 등 각종 모임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층’ ‘한부모 가정’ 등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까닭이다.
2014년 여성가족부가 설립한 양육비이행관리원이 ‘한계’를 보이고 있는 점도 문제다. 이 관리원은 양육을 하지 않는 부모의 양육비 이행을 확보하고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 하지만 약 3년간 관리원을 통해 미혼부모 가정에 양육비가 이행된 건수는 전체 2422건 중 78건으로 3%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관리원이 강력한 권한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 미혼모가 관리원의 도움을 받아 양육비청구 소송에서 승소해도, 관리원은 양육비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앞서의 유미숙 팀장은 “양육비이행관리원은 역할이 미미하다. 실효성도 없고 역할 대행에 그치고 있다. 미혼부가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돌리면 받기 어렵다. 이런 경우에 관리원이 소득을 추적해서 징수를 해야 하는데 그런 권한이 없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히트 앤드 런 방지법’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인 셈이다. 청원자 A 씨는 덴마크를 사례로 들었지만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무책임한 아빠’들에 대해 철퇴를 가하고 있다.
실제로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은 미혼모에게 양육비를 먼저 지급한 뒤 미혼부를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하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 영국, 뉴질랜드에서도 한부모를 대신해 전담기관이 비양육 부모에게 양육비를 징수한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에 비양육자의 여권 발급을 불허하거나, 운전면허를 취소하고 공공기관 허가 사업의 면허를 제한하는 ‘징벌’을 내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히트 앤드 런 방지법’ 도입이 번번이 무산됐다. 17대 국회부터 양육비 대지급 제도에 대한 법 발의가 있었지만 재정 부담을 이유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2013년 18대 대선 직후에도 민현주 의원이 양육비이행관리압류 추심 권한을 포함하는 ‘양육비 이행 확보 지원기관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결국 막판에 강제 조항이 빠져버렸다.
이광호 ‘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은 “미국은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면 전담 사회복지사가 따라붙고 아르바이트를 알선한다”며 “일단 국가가 양육비를 대주고 남자가 스무 살 넘어가서 취직하면 국가가 구상권을 발동해서 월급의 일정액을 차압한다. 책임 교훈의 일환이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여성가족부는 ‘히트 앤드 런 방지법’ 성격의 양육비 대지급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지만 내부에서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여성부 관계자는 “18대, 19대 국회 당시 발의된 양육비 대지급 제도는 전부 폐기됐다. 예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가는 제도이기 때문이다”며 “19세 미만의 자녀에게 양육비를 전부 대지급할 경우 예산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재정부담’이란 키워드가 또 다시 미혼모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