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차제·공공기관, 관광뿐 아니라 정치 이득 위해 수십억 들여 ‘우후죽순’ 조성
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 전경.
정비 사업에는 20억 원가량이 들었다. 한때 이 전 대통령 고향마을은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떠들썩했다. 포항시 집계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임기 기간 고향마을을 방문한 사람은 80만 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방문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국민권익위원회 연수원에 설치한 표지석도 논란이 되고 있다. 표지석에 적힌 ‘청렴이 대한민국을 바꾼다’라는 문장은 이 전 대통령의 자필 휘호다. 국민권익위는 공직자 부패방지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인데 비리에 연루된 이 전 대통령 휘호가 담긴 표지석은 부적절하다는 민원이 빗발쳤다. 이에 대해 국민권익위 측은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는 일단 기다려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본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전국적으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자체간 박정희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면서 한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스쳐가기만 했어도 기념물이 생긴다는 비판도 있었다.
일례로 경북 울릉군은 지난 201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 하루 머물렀던 옛 울릉군수 관사를 예산 약 12억 원을 투입해 ‘근대문화유산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강원도 철원군은 지난 2016년 박정희 전 대통령 군 전역식이 열렸던 곳에 ‘박정희 장군 전역 공원’을 만들었다. 공사비로 투입된 돈은 약 60억 원이었다. 군 전역식이 열린 곳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냐는 논란이 일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 지정을 놓고는 지자체 간에 다툼까지 있었다. 포항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성리에서 국무위원들을 대동하고 비교행정회의를 주재한 것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문성리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지었다. 반면 청도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해재해지역 시찰 도중 청도읍 신도마을을 방문한 것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신도마을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을 세웠다. 기념관과 공원 건립에는 약 95억 원이 투입됐다.
지난 2017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국 지자체가 편성한 예산이 2000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탄핵 정국에 접어들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시설은 물론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시설도 수난을 당했다. 대구시 박근혜 전 대통령 생가터 표지판은 누군가 빨간 스프레이를 뿌려 훼손했고 경국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관은 방화로 영정과 내부가 훼손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인근 동상과 기념 시비 등도 훼손됐다.
탄핵 사태 이후에는 관련 기념물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지난 2015년 개관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을 직접 찾아가봤다. 이곳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58년부터 1961년까지 3년 3개월 동안 거주했던 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살았다. 서울시 중구는 박정희 가옥 주변에 약 300억 원을 들여 역사문화공원 조성을 추진 중이다.
평일 오후 가옥을 찾았지만 동네 주민들만 주변을 지나갈 뿐 관람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가옥 관리인은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결과적으로 예산낭비를 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관리인은 “탄핵 사태 이후에도 매일 50여 명은 꾸준히 가옥을 방문하고 있다”면서 “오늘은 유독 관람객이 없는 날”이라고 말했다.
가옥으로 가는 길에는 시장이 있었다. 가옥 복원 사업 후 상권 활성화에 도움이 됐느냐는 질문에 상인들은 “큰 차이를 못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약 300억 원이 투입되는 사업치고는 별다른 파급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기념사업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예산 문제로 장기 표류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은 올해 첫 삽을 뜨고 본격 추진되고 있다.
기초의회 의장을 역임한 한 정치인은 “각 지자체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관광 상품 개발에 힘을 쏟는다. 관광 상품을 새로 개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유력 정치인 기념사업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사업이지 않나. 보통 20억~30억 예산이 투입된다고 하면 정말 가성비가 좋은 것”이라며 “그러니 각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유력 정치인 관련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직 한국당 의원은 “(박정희 사업 열풍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박심을 얻고 싶어 하는 지자체장들의 경쟁이 만든 현상”이라며 “유력 정치인 관련 사업을 통해 정치적으로 이득을 얻고 관광 수입도 올리려는 지자체가 너무 많아지고 있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던 권민호 거제시장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권 시장은 이후 한국당을 탈당하고 더불어민주당에 입당 신청을 했다. 이른바 문심을 얻기 위해 문 대통령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려 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외에도 경남 합천군은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를 복원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군은 매년 생가 유지 관리비로 3000만 원가량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 전남 장성군은 김황식 전 국무총리 생가를 복원하려다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충북 음성군은 약 50억 원을 들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생가터를 복원했다.
무분별한 정치인 관련 기념사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처럼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지자체의 골칫거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앞서의 전직 의원은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는 시설에 투입되는 예산은 국민들도 이해하겠지만 유력 정치인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개연성도 없는 기념시설을 만드는 것은 문제”라면서 “큰 고민 없이 수십억 원을 투입했다가 찾는 사람이 없어 흉물로 남는 사례도 많다”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