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이 두 번 지나도 첫발은 늘 새롭다
▲ 수묵화처럼 고즈넉한 소백산 죽령. | ||
소백산의 한 고개인 죽령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도계상에 있다. 소백산 능선은 도솔봉에서 죽령을 지나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진다. 1314m의 도솔봉에서 689m의 죽령으로 능선이 낮아졌다가 다시 1394m의 연화봉으로 솟구친다. 죽령은 도솔봉과 연화봉 사이의 잘록한 허리와 같은 지점이다.
지금은 5번 국도가 뚫려 단양과 영주를 잇지만 옛날에는 모두 산중으로 난 고갯길을 이용해야 했다. ‘죽령 옛길’이라 부르는 이 길은 무려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길은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의 여러 마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이용됐다. 그러나 길은 그 이후 잊혀졌다.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생명을 잃었다. 잡풀이 길을 가리고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았다. 마치 폐가처럼 사람이 다녔던 흔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길이 생명을 다시 얻은 것은 1999년 5월. 영주시에서 옛길 복원 차원에서 길을 정비한 것이다. 별 관심을 받지 못한 사업이었지만 하찮아 보이는 이 길은 그러나 뻥뻥 뚫린 도로들과 다른 매력을 발산하며 은근히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길의 길이는 고작 2.5㎞에 지나지 않는다. 길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접근 방법은 당연히 두 가지. 영주 쪽에서는 희방사역 위로 올라가도 되고, 단양 쪽이라면 5번 국도변 죽령주막 앞에서 이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왕복 시간은 2시간이면 족하다.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오르막 구간에 1시간, 반대로 내리막은 50분 정도 걸린다. 자동차를 이용해 이 구간을 간다면 아무리 산등성이를 돌고 도는 길이라 해도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단지 시간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이 길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길에는 하찮은 돌멩이에도 유구한 발품의 역사가 깃들어 있고 느긋한 여유가 있으며, 굽이굽이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가슴을 설레게 한다.
▲ 굽이마다 다른 풍경을 간직한 죽령 옛길은 걷는 재미가 남다르다(맨 위), 고춧대를 태우며 농사의 마지막 갈무리를 하는 순흥면 읍내리 농부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맨 아래). | ||
길은 평지도 있지만 평균 15도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을 유지한다. 걷기에 힘들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다. 길에는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발을 내딛는 기분이 폭신하니 좋다. 참나무 등 활엽낙엽길을 지나면 ‘느티정’ 주막거리가 나온다. 주막이 있었다는 안내표지가 있어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그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죽령길은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향했던 선비들과 온갖 장사치들이 이용했던 곳인 만큼 술집, 떡집, 짚신가게, 객점, 마방 등이 늘어서 있는 주막거리가 많았다. 그중 가장 큰 곳이 희방사역이 있는 마을 어귀의 ‘무쇠다리’ 주막거리였고 그 다음이 이곳 ‘고갯마루’ 주막거리, ‘느티정’은 세 번째 크기의 주막거리였다. 가장 작은 곳은 고갯마루 밑의 ‘주점’이라는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주점’ 주막거리부터는 빨간 침엽낙엽길이 시작된다. 생김은 우리 소나무처럼 보이는데 실은 일본잎갈나무다. 이곳에는 일본잎갈나무들이 200m 넘게 길 좌우로 꽉 들어차 있다. 소나뭇과의 낙엽 교목인 이 나무는 1904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높이 30m, 지름 1m까지 자란다지만 아무래도 생육환경이 일본과 다른 탓인지 길지만 가늘게 뻗어 있다. 이 나무는 우리 소나무와 달리 잎이 진다. 그래서 ‘잎이 지는 소나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잎은 전나무보다 더 빨갛다. 메타세쿼이아와 흡사하다.
길옆으로는 작은 계곡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펼쳐진다. 계곡은 그러나 눈에 덮여 물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길에는 군데군데 통나무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길을 오르다 숨이 차오를 그 지점이면 꼭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 길에는 수많은 전설이 서려 있다. 오대산 상원사로 실려 가던 동종이 이 고갯길에 다다라 꿈쩍도 하지 않자 동종의 젖꼭지 일부를 떼어내자 움직였다는 전설, 풍기군수 이황이 사촌형을 배웅하던 잔운대와 촉령대 등의 전설이 길손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죽령길을 다 오르면 실제 주막이 하나 있다. ‘고갯마루’ 주막거리를 재현한 곳이다. 곤드레나물밥과 막걸리 등을 판다. 산길을 걷느라 고단한 몸은 풍기읍내 가는 길에 자리한 풍기온천에서 풀도록 하자. 소백산풍기온천의 물은 유황, 불소, 중탄산 등이 온천수에 용해돼 있어 만성관절염, 신경통, 만성기관지염, 피부미용에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곳이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소수’(紹修)란 이름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한다’는 뜻으로 학문 부흥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소수서원 못 미쳐 순흥면에는 석불입상과 벽화고분, 600년 된 느티나무 등이 있다. 잠깐 차를 세워 둘러볼 만한 곳들이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여행 안내
★길잡이: 영동고속국도 만종분기점→중앙고속국도 풍기IC→단양 방면 5번국도→희방사역→죽령 옛길
★먹거리: 풍기는 인삼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인삼이 들어가는 삼계탕도 알아준다. 25년 전통의 ‘풍기삼계탕’(054-631-4900)은 커다란 무쇠가마솥에 100여 마리의 닭을 넣고 한꺼번에 끓여내기 때문에 살이 보드랍고 국물이 진하다. 인삼도 직접 주인이 골라 다듬은 것들로 싱싱하고 크다. 삼계탕 8000원. 영주시 하망동에 있다.
★잠자리: 아무래도 영주시내로 나오는 것이 좋다. 휴천동에 ‘리치호텔’(054-638-4800), 가흥동에 ‘소백파크관광호텔’(054-634-7800) 등 호텔과 모텔이 많다. 풍기읍 성내리에도 ‘풍기인삼관광호텔’(054-637-8800)이 있다.
★문의: 영주시청 문화관광포털(http://tour.yeongju.go.kr) 문화관광과 054-639-6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