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없이 고금리 누르면 저신용자는 음지로”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6일 ‘저축은행 최고경영자 간담회’에 참석해 저축은행업계의 영업행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제2금융권을 잔뜩 긴장하게 한 ‘금융권 저승사자’는 취임 보름 만에 사임했으나 금융당국은 가계부채 관리 강화에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와 법정 최고금리 인하 등 서민금융 강화 정책이 쏟아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제2금융권은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 강화 계획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저축은행중앙회에서 열린 저축은행 최고경영자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지난 16일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발표하며 지난달부터 시중은행에 도입된 총체적상환능력비율(DSR)제도와 개인사업자대출 가이드라인 등을 제2금융권에 확대 도입키로 했다. 총체적상환능력비율(DSR·Dept Service Ratio)은 차주의 소득 대비 전체 금융부채의 원리금 상환액 비율을 뜻하는 것으로,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신용대출을 모두 합산해 대출가능액을 제한하는 제도다. 개인사업자대출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부동산임대업대출에 대한 이자상환비율(RTI·Rent To Interest) 심사와 유효담보가액 초과분 분할상환 제도 도입 등이다.
금융당국이 제2금융권의 대출 규제를 강화키로 한 이유는 은행권 대출 규제 강화에 따라 대출수요가 제2금융권으로 이동, 가계부채의 질이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제2금융권 대출 규제 강화를 통해 취약차주의 상환 능력을 확인하지 않고 고금리 대출을 하고 있는 영업행태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금감원은 “저축은행이 예금자보호제도를 기반으로 저리의 자금조달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예대금리차를 통해 높은 수익을 시현 중”이라고 지적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저축은행 가계신용대출 차주 115만 명 가운데 94만 명(81.1%)에 달하는 차주가 연 20%가 넘는 고금리를 부담하고 있으며, 특히 일부 저축은행은 차주의 신용등급과 무관하게 고금리를 일괄 부과하는 영업행태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 2월 중 신규 취급한 가계신용대출의 경우 법정 최고금리 인하로 고금리대출의 비중이 감소했으나 여전히 신규 가계신용대출에서 고금리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54.9%로 높다. 대부계열 등 일부 저축은행이 지속적으로 신규 고금리대출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제2금융권 대출 규제 강화가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가계부채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 없이 제2금융 대출의 문턱을 높이면 다중채무자이면서 저신용 혹은 저소득인 취약차주들이 대부업체나 P2P(개인 대 개인)금융 등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부채 증가율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취약차주들은 시중은행보다 비은행권에 기대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29일 공개한 ‘금융안정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59.8%로, 부채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여전히 웃돌고 있으며 전년 154.6% 대비 5.2%포인트 상승했다. 또한 취약차주의 금융기관별 대출 비중은 지난해 말 비은행권이 66.4%로 은행권(33.6%)의 두 배 수준으로 나타났다. 비은행금융기관별로 보면 상호금융사 26.2%, 여신전문금융회사 15.5%, 대부업 10.2% 등의 비중이 두드러졌다. 저축은행과 보험사는 각 8.0%, 4.8%를 차지했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최고금리 인하를 단행함과 동시에 제2금융권에 대해 가계대출 증가율 목표치를 언급하는 등 ‘대출총량제’를 시행하자 제2금융권은 신규 가계대출을 중단하고 있다. 특히 저축은행 등은 수익이 작은 정책금융 상품을 중단하고 고금리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한 신용기관 관계자는 “제2금융권은 원래 일반 시중은행보다 이율이 높지만, 한 자릿수대 이율로 대출이 가능한 햇살론 등 정책 서민금융상품이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의 규제 강화로 일부 저축은행에서 이를 중단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정부는 이율을 낮추는 데 정책 목표가 있지만, 제2금융권 입장에서는 취약차주들에게 대출할 때 리스크가 큰 것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저축은행과 여신전문금융회사를 대변하는 저축은행중앙회와 여신금융협회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이 금융권에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며 은행권마저 배당을 낮추고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있는데, 비은행권이 금융당국에 반발하기는 어렵다는 것. 저축은행중앙회 관계자는 “금융권 전체에 규제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저축은행만 나서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맞춰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규제 강화로 제2금융권의 ‘몸 사리기’가 이어지자 서민들의 자금조달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결국 취약차주의 대출수요가 불법 사금융 등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위나 금감원 위주로 추진되는 가계부채 대책을 정부 전 부처 차원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정부의 계획은 심사를 강화해 대출금을 줄이겠다는 것인데, 대출 수요가 줄지 않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대부 등 사금융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제도권에서 서민들을 위한 정책금융을 활성화해 대출수요를 유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 국장은 또 “가계부채 문제를 금융 하나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금융위나 금감원 위주로 진행되는 것에서 벗어나 정부가 여러 부처들과 함께 종합적으로 가계부채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