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피해자 지지 성명 내고 당시 상황 증언 나서…김성룡 9단과 한국기원 유감표명조차 안해
가해자로 지목된 김성룡 9단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기원은 사과나 유감 등 입장표명도 않고 있어 바둑계는 더욱 들끓고 있다.
보다 못한 여자 프로기사들 51명이 21일 최근 논란이 일었던 바둑계 미투에 관해 피해자를 지지하고 조속한 해결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여자 기사들은 “지난 2009년 6월 5일 김성룡 9단이 디아나 초단을 성폭행한 사건에 대하여 피해자인 디아나 초단을 지지하고 끝까지 함께할 것임을 밝힌다. 사건이 공개된 지 5일이 지났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김성룡 9단이나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한국기원으로부터 어떠한 공식입장도 들을 수 없었다. 때문에 어렵게 사실을 공개한 디아나 코세기 초단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한국기원은 조속히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할 것을 촉구한다. 빠른 시일 내에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해결을 위해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다짐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한국기원 소속 여자기사는 64명. 활동을 쉬고 있는 기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이 동참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김 9단이 일부 매체에 “변호사를 선임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의중을 밝히자 그동안 침묵하던 기사들이 잇달아 증언에 나섰다.
인터넷 바둑매체 사이버오로에 따르면 디아나 초단과 가장 친한 동료 여자기사 A가 가장 먼저 증언에 나섰다. 디아나 초단이 성폭행당한 2009년 6월 5일 바로 다음날인 6일, 당시 겪은 일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았던 유일한 동료기사다.
A는 “너무 충격적이라 사실 처음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화가 났으나, 그 당시 우린 어려서 도저히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건은 절대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었다. 디아나가 당시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울며 말했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성룡의 합의된 성관계였다는 주장에 화가 난다. 디아나는 9년간 이 일로 깊은 상처를 받았고, 수많은 날을 고심한 끝에 힘들게 이 일을 밝히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한편 성폭행을 당하고 5개월이 흐른 11월 16일 GS칼텍스배 예선1차전에서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디아나 초단과 김성룡 9단의 대진이 짜였다. 이에 너무 괴로웠던 디아나 초단은 평소 친분이 있던 바둑관계자 B를 찾아가 “김성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다음은 B의 증언.
B는 “디아나가 나를 찾아온 것은 당시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어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며, “성룡이는 나와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라고 답하자 디아나는 “그는 나쁘다. 자기 집에 오라고 해서 갔는데 술 먹고 자신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해 놀랐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설마 그 나쁜 짓이 성폭행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좀더 공감하며 사실에 대해 물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증인은 더 있다. 프로기사 김승준 9단은 “9년 전 디아나가 무척 괴로워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김성룡의 합의된 성관계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누가 합의된 성관계 후 그렇게 괴로워하는가. 돌이켜보니 그때 디아나가 힘들게 사인을 보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성추행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고 괴로워했다.
여자 기사들이 들고일어서자 결국 동료 기사들도 나섰다. 프로기사들은 24일 대의원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김성룡 9단을 ‘제명’하기로 했다. 다만 대의원회 의결만으로 곧장 제명되는 것은 아니고 후에 있을 프로기사회와 한국기원 이사회 의결 단계를 거쳐야 최종 확정된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함에도 당사자인 김성룡은 물론 한국기원은 여전히 오불관언이다.
이에 대해 한 바둑 관계자는 “어쩌면 현 한국기원 집행부인 홍석현 총재-송필호 부총재-유창혁 사무총장 라인의 의사결정 구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때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혹여 스폰서가 떨어져 나갈까 곤혹스러워 차라리 입을 닫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창혁 총장이 중심인 한국기원 사무국의 의사결정 인적구조를 보면 주요 회의에 참여하는 실장급 5명 중에 정작 한국기원 출신 직원(부장)은 단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J 일보 관련 인사나 퇴사 인맥으로 채워져 있다. 솔직히 프로기사 이름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바둑계의 정서와 역사, 배경 등을 단기간에 이해하여 당면한 현황과 과제에 대해 발 빠르게 대처하길 기대한다면 욕심일 것이다. 이들이 지닌 재능과 능력을 논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의사결정 과정과 인적 구성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도무지 전략도 기획도 없어 보인다”고 꼬집었다.
바둑계 모두가 한 목소리로 위기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때, 정작 ‘한국바둑의 본산’이라고 주장하는 한국기원만이 먼 산 불 보듯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