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그 기사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매우 도덕적이어서 도덕적이지 않은 정치인들을 모두 한 칼에 날려보냈다. 길은 엄청나게 막혀 있었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는 열심히 말을 날랐다.
그에게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는 순수했고 너무나 순수해서 오히려 위태로웠다. 손님의 입장을 고려하는 성향이 아니었으므로.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가기 위해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갑자기 그의 표정이 난감하게 구겨졌다. 그가 이야기했던 방식이나 지금의 표정으로 미루어 나는 그가 “행정수도이전 결사반대”를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충주, 고향에서는 아직도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다. 논이 30마지기가 있다.
그런데 그 농지가 갑자기 평당 백만원 이상이 된 것이다. 한 마지기의 땅도 팔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옛날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으니까. 기쁘기 짝이 없어야 할 텐데 그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명절 때도 찾아오지 않았던 누이들과 매형들이 주말마다 부모님을 뵈러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거, 속보이는 거 아닙니까? 와서는 자꾸, 땅 조금이라도 팔아 노후에 편하게 쓰시라고 한다니, 어디 그래서 되겠어요?”
그래서 자기가 내려가서 땅문서, 집문서 모두 가져왔단다. 단지 ‘보관’하기 위해. 나는 웃었지만 씁쓸했고 쓸쓸했다. 평화롭게 잘 살던 가족이 돈벼락을 맞아 어떻게 변화할지 보였으므로. 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할 것 같은 그 기사와 기사의 누이들이 부모 재산을 탐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벼락의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돈벼락의 속성이므로.
내 부모가 그렇게 돈벼락을 맞았다면? 우애가 깊은 우리 형제들도 그랬을 것이다.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경계하는 와중에서. 그러다 보면 한 자리에서 만들어지고 한 가족으로 자라, 자기자리를 찾아 흩어진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갈등하고 할퀴고 원수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돈벼락은 축복이 아니라 벼락이다. 어디 돈벼락뿐일까.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축복은 그 순간 저주가 된다. 이상헌의 <깨달음>이라는 책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순례를 하는 순례자가 어느 마을 입구에서 금덩어리를 주웠다. 한 청년이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간밤에 동구 밖으로 가면 보물을 가진 이를 만날 테니 받아오라는 꿈을 꾸었다고. 순례자는 망설임 없이 그 청년에게 금덩이를 내준다. 그날 밤 청년이 다시 순례자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금덩이를 그렇게 쉽게 제게 준 걸 보니 이 금덩이는 꿈에서 말한 보물이 아닌 것 같다고. 금덩이를 돌려드릴 테니 금을 서슴없이 내어준 그 마음을 달라고.
돈의 많고 적음이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마음의 중심이 생길 때까지 돈벼락은 저주다. 마음의 중심! 마음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거고 마음을 얻으면 모든 걸 얻는 것이다.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