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황 감독은 인간으로 태어난 죄를 고백하는 그 힘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그런 황 감독이 슬퍼하는 세상은 자본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숲이 없는 세상이고,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세상이 아니라 야생의 동물들을 자연에서 잡아다가 동물원에 가두는 세상이다.
그리고 보면 장 지오노도 인간으로 태어난 죄책감으로 인해 <나무를 심은 사람>을 썼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무를 심는 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지만 모든 생명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다. 땅이 살아나고, 새가 살아나고, 물이 살아나고, 사람이 살아난다. 나무의 힘이었고 묵묵히 나무를 심은 사람이 만들어낸 평화였다.
마침내 그렇게 생명들을 살려낸 여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번에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왕가리 마타이는 나무를 심는 여자였다. 그녀는 1977년 “심는 나무보다 베어지는 나무가 더 많다”는 단순한 걱정에서 마당에 아홉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서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무를 심는 것이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거라면서 30년 간 케냐와 아프리카에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니까 그녀의 아프리카 사랑이 얼마나 생기 있고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짐작이 된다.
나무를 심고 나무 심는 운동을 했던 그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건 시대정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준 중요한 증거다. 환경 혹은 생태가, 나무와 숲이 평화의 조건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숲과 숲에 의존해 있는 생명들이 평화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의존해 있는 생태적 조건이 위기라는 뜻이 아닐까? 지금 이 세상에서는 하루에 1백36종의 생물종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한반도 남쪽은 한술 더 뜬다.
이번 22일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환경영화제의 개막작은 옴니버스 영화1,3,6이다. 왜 136이냐고 최열 대표에게 물었더니 세계 1백42개국 중에서 우리의 환경지수가 1백36위란다. 이제 우리에게 환경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조건이다.
세상이 오염되면 부모들이 오염되고, 부모들이 오염되면 아이들이 오염되고, 아이들이 오염되면 미래가 오염되는 것이다. 이미 그걸 알았던 와바나키족 추장 큰 천둥은 19세기 말에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
“위대한 정령이여, 우리에게 가슴을 주소서. 욕심에 눈이 멀어 마구 파괴하지 않도록, 대지를 아름답게 하는 일에 기꺼이 우리의 일손을 빌려줄 수 있도록,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것을 대지로부터 빼앗지 않도록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가슴을 주소서. 대지를 파괴하면 혼란이 옵니다. 대지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면 우리의 영안이 멀게 되어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다칩니다. 우리가 대지를 보살필 때 대지가 우리를 보살핍니다.”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