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22] 날줄과 씨줄로 엮는 인내와 조화의 생활예술
한 필의 모시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땀과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은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씨. 연합뉴스
한산 모시짜기는 한산 지역에서 모시풀이라는 자연 재료를 이용해 전통 베틀에서 고유의 방법으로 모시 옷감을 짜는 기술과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이 공유하는 조화로운 공동체 문화를 말한다. 예부터 한산은 여름 평균기온이 높으며 해풍으로 인해 습하고 토양이 비옥해 다른 지역에 비해 모시가 잘 자라고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산 모시가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1635) 6월 15일 기록에는 명나라 관리에게 보낼 예단에 대해 호조에서 임금에게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백저포(흰색 모시)의 대표적 산지로 한산이 거론된다.
‘저포’, ‘저치’라고도 불렸던 우리 모시는 오래전부터 주변 국가들이 인정하는 뛰어난 직물이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모시는 삼국시대(4~7세기)에 처음 해외로 수출되었고, 고려시대(8~14세기)와 조선시대(12~20세기)에는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 외국 사신단에게 건네는 예물의 목록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물품이기도 했다. 태종은 명나라 수도에 사신을 보낼 때 모시 100필을 주어 비단을 사오도록 한 적도 있었다(‘조선왕조실록’ 태조 18년 1월 1일 기록). 그 비단으로 조복(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 입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이는 조선의 모시가 중국 현지에서 ‘통하는’ 인기 상품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한산 모시는 모시풀 재배 및 수확, 모시풀 삶기와 표백, 모시풀 섬유로 실잣기, 전통 베틀에서 모시짜기 등 여러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모시 날실에 풀을 먹이고 말릴 때는 한여름에도 불 앞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모시짜기는 통풍이 되지 않는 움집에서 이뤄지는데, 이는 습도가 낮으면 끊어지기 쉬운 모시의 속성 때문이다. 한 필의 한산 모시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땀과 시간,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한산 지역의 모시 생산자들은 길고 고된 작업 과정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모시를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한산 모시짜기 방법을 고수해 왔다.
한산모시문화제에서 모시옷을 입은 모델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연합뉴스
한산 모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모시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는 컸고, 한산 모시의 명성도 여전했다. 당시엔 고급 모시를 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미혼 여성의 경우,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상적인 신붓감으로 환영받았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 전에 모시짜기 기술을 자진해서 배울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화학섬유가 국내에 빠르게 유입되면서 전통 모시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모시짜기의 본향 한산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서천군 한산면 일대에서 모시 생산을 해온 가구수는 1950년대만 해도 2500가구에 달했으나 1980년대에는 100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정부가 1967년 한산 모시짜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모시짜기 기술과 전통을 전승하도록 지원해왔지만, 전통 모시의 도태를 막기는 어려웠다.
지금도 한산 모시짜기의 위기는 진행형이다. 전통 방식 그대로 모시짜기를 배우려는 이들도, 또 그렇게 만들어진 한산 모시를 찾는 이들도 여전히 적다. 하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한산 모시짜기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은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산 모시짜기는 기능보유자인 방연옥 명인(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과 2명의 전수교육조교를 중심으로 기술 전승이 이뤄지고 있다. 서천군이 한산모시관을 운영하며 한산 모시의 보급과 홍보에 나서는 등 지역사회도 한산 모시짜기의 부활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