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안쓰럽다. 왜 죽어야 하는 지 이유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억울함도 안쓰럽고, 쌓여가는 분노를 처리하지 못해 불특정 다수에게 투사해버린 살인자의 분노도 안쓰럽다. 그리고 뉴스를 듣고 경악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우리들의 무능력도 안쓰럽다.
만약 우리도 총기 소지가 자유로웠다면 어땠을까. 이 땅에서는 그런 기막힌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나는 총기소지 여부가 문제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현대사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이기적이게 하고 아프게 한다. 너무도 많은 우리가 소외감에 절어 어찌할 줄 모르는 분노를 품고 있다. 무한경쟁의 시스템이 가동되는 사회에서 늘 비교당하고 비교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닫히고 있는 내 마음의 문! 그 황폐한 혼자만의 방에 들어앉아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강퍅하게 불안과 분노를 키우는 시간들이 많다. 너무나 많다.
그러나 어쩌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소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한쪽에서는 좌절할 일이 많고 박탈감이 자연스러워도, 한 번뿐인 생은 준엄한 것이어서 핑계 댈 수가 없는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나’라고 한다면 좌절이나 실망으로 돌아앉아 분노를 키우는 일은 ‘나’를 버리는 일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게 바란다. 웬만한 좌절이나 실망으로 돌아앉아 마음의 문을 폐쇄하지 않게 되기를. 차라리 부정적인 경험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두려움을 응시하게 되기를. 불행까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세상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
누구에게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심리의 어두운 부분이 존재한다. 융에 따르면 그림자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유쾌하지 못한 자질들, 인간 본성의 열등하고 유치한 측면들이다. 그것은 본능이며, 충동이고, 분노이며, 불안이다.
이러한 부정적 기질들은 억누르거나 외면하면 감춰둔 채로 숨어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내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삶의 파란을 만든다. 멀쩡한 줄 알았던 내가 그토록 충동적이었다니, 따뜻한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다니, 고상한 줄 알았던 내가 그토록 파괴적이었다니, 하면서 ‘나’에게 놀란 적이 없는가. 버림받은 그림자 짓에 대한 ‘나’의 탄식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사실 그림자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 그림자 속에는 황금이 있다. 초라하고 촌스러워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겠느냐던 나사렛에서 그리스도가 성장한 것처럼 무시되고 외면되어왔던 그림자 속에 진주가 있다. 조개가 돌을 품고 아픔 속에서 진주를 만드는 것처럼, 내 속의 분노를 응시하고 내 속의 불안을 품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스스로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분노에 먹히지 않을 테니까.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