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서울 봉천동이나 신림동 같은 큰 동네에서 집 찾기가 어려운 것은 같은 번지 안에 여러 채의 집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2월, 국토연구원의 한 간부는 “서울 신림동 1449의 30에는 48채의 집이 있고 용산구 3가 40에는 본번 하나에 부번이 3000개”라며 정보화시대에 맞게 새 주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신림동과 봉천동의 동 이름이 바뀔 모양이다. 정부의 동(洞) 통·폐합 방침에 따라 서울 관악구가 ‘신림’이나 ‘봉천’이 들어가는 20여 개 동을 통·폐합하면서 이름까지 바꾸기로 했다. 봉천본동+봉천9동은 성현동으로 봉천2동+봉천5동은 청룡동으로 신림3동+신림13동은 금란동으로 각각 개명하기로 한 것이다.
동 이름을 바꾸자는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까지는 좋으나 이왕 새로 지을 바에는 좀더 참신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서 이름을 지었겠지만 성현동이니 금란동이니 청룡동이니 하는 이름에는 신선감이 없다.
새삼 한자어를 찾아 작명을 할 게 아니라 아예 한글로 된 아름다운 말을 찾아 듣기 좋고 쓰기 좋은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다 알다시피 일산, 분당 등 수도권 신도시에는 순수한 우리말로 된 아름다운 마을 이름들이 많다. 샘터마을, 옥빛마을, 산들마을, 아름마을, 하얀마을, 느티마을, 정든마을 등등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들인가. 지하철역 이름에도 애오개, 굽은다리, 선바위, 장승배기, 버티고개, 먹골, 뚝섬 등의 옛날 지명을 되살려 쓰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이름은 마을이나 지하철 역 이름으로는 괜찮지만 법정 행정 동명(洞名)으로는 안된다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나으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 말로 전국의 우리말로 된 마을 이름, 예를 들어 까치골을 작곡동(鵲谷洞)으로 새못골을 신지동(新池洞)으로 바꾸었던 조선 총독부적 사고방식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가회동이나 삼청동, 효자동 청운동처럼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동은 굳이 이름을 고칠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몇 개동을 합쳐 행정서비스를 하는 방법도 있다. 인구 2만 명이 안되는 행정 동은 무조건 인접 동과 통·폐합해서 일률적으로 동네 이름을 새로 붙이는 것은 자칫 쇠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되기 십상이다.
더 끔찍한 것은 서울의 몇몇 지하철 역 이름에서 보듯 유서깊은 동네 이름을 제치고 멀리 떨어진 대학 이름을 갖다 붙여가며 특정대학의 홍보 들러리 서는 식의 작명이다. 이왕 동네이름을 새로 지을 바에는 여기 저기 눈치보느라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리지 말고 우리 마을 이름 우리말로 짓는다는 마음으로 아름답고 듣기좋은 한글 이름들을 많이 지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