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변호사가 되어 스스로를 변론하는 대화록이다. 내가 왜 젊은이를 선동하지 않았는지, 내가 왜 이상한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닌지, 대화록의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해 간다. 많은 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마음이 열려 마음을 바꿨지만 소크라테스도 다수결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유죄’ 판결을 받고 결국 ‘사형’되었으니까. 민주정치는 우민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플라톤의 경고는 스승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뼈저리게 느낀 역사적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민주정치 외에 다른 대안은 좋기만 한가. 철인정치는 독재정치로 변질될 수 있는데. 언제나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의 그림자를 치면서 ‘새로운 것’으로 자리매김되지만 그 또한 존재감을 가지고 자리를 잡다 보면 그림자를 피할 수가 없다.
어쨌든 현대사회에서는 더더욱 민주정치 외의 다른 대안은 현실적이지 않다. 우민정치가 되는 한이 있어도 현대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민주정치라 생각된다. 사실 민주정치에 의해 죽은 소크라테스를 생각해 보면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절절해진다. 우리 정치의 수준은 우리의 수준이다. 뽑아놓고 욕하지 말고 제대로 뽑아야 한다.
누가 왜 투표를 안하는가 하는 연구 중에 유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바로 찍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도둑놈이고, 누구는 무능하고, 누구는 검증되지 않았는데 누구를 찍을 수 있겠느냐고 똑똑한 소리를 하면 정말 할 말은 없다. 그래서 웃으면서 말한다. “그러면 네가 하면 되겠네!”
리더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최상을 기대하는 것이지만 리더는 최상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생각은 또 얼마나 무서운 집착인지. 오래된 그 생각의 집착이 냉소가 되고 방관이 되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사실 인생에서 최상의 게임은 별로 없다. 당신은 지금 최상의 선택만 하고 그 자리까지 왔는가. 우리 인생이 그럴진대 정치는 오죽할까. 때로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 그게 삶의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날이다.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나. 혹은 여전히 찍을 사람이 없는가. 문제는 우리가 찍지 않아도 대통령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악의 정치는 기권한 사람들의 방관이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은 정말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자리다. 내 방관적인 태도가 대통령을 결정하게 두지 말고 우리의 지혜를 모아보자. 찍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수록 투표에 참여해 보자. 그러면 내가 어떤 기준에 의해 대통령을 선택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놀랄 테니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