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여든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사랑 앞에서 소녀가 된 가난한 할머니가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께 묻는다. 어떻게 죽고 싶으냐고. “몰라. 자식들에게 둘러싸여서 병원에서 죽는 것도 싫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도 싫어. 몰라! 그냥 웃으면서 죽고 싶어!”
할아버지는 우유배달부고, 할머니는 폐지를 모으러 다닌다. <그대…>를 보고 있으면 가난도 희망이고 늙음도 희망이다. 세월의 무게로 디자인 된 깊은 심성의 달동네 노인들이 젊은이를 감동시키고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으니까. <그대…>엔 돈을 매개로 편하고 쉽게 사느라 부자가 잃어버린 팔딱팔딱한 생의 진실이 있다. 무지막지한 열정의 무게에 짓눌린 젊은이들이 놓쳐버린 섬세한 열정의 무늬들이 있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진짜 사랑하게 된 할머니를 ‘당신’이라 하지 못하고 ‘그대’라 하는 걸까. 할아버지의 처는 5년 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명령조로 딱딱거리기만 한 무뚝뚝한 남편이었다. 깨달음은 언제나 늦는 법.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잘해주지 못한 게 한이 됐다. 고생만 하고 세상을 뜬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새로운 여자를 ‘당신’이라 하지 못하는 저 촌스런 남자의 ‘그대’는 과거에 대한 참회로 돈후해진 남자의 순정인 거다. 이제는 명령하고 딱딱거리는 삶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을 하고 싶은 할아버지가 묻는다. “이뿐이, 나 자네한테 잘 하고 싶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만석 씨, 나 있잖아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세상에, 함께 살 날도 많지 않은데, 고향으로 가버리겠다니요. “우리는 나이가 있으니 죽음으로 헤어지겠지요. 그러면 이 행복이 큰 만큼 더 큰 슬픔으로 변하겠지요. 그걸 견딜 수 없을 거 같아요.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 행복을 간직하면서 남은 생을 늙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보니까 고향은 한 때의 기억을 품어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곳인 모양이다. 고향을 잃고 도시로 나와 도시빈민으로 버려진 할머니는 사랑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힘을 얻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랑은 자기자리를 찾아주는 힘이라 하는 모양이다. 사실 강원도 영월이 왜 이리 가깝냐고 투덜거리며 이뿐이를 고향땅에 내려놓고 돌아온 할아버지의 속마음은 이뿐이 할머니와 살고 싶은 것이었다.
그 후로도 할아버지는 5년을 더 살았다. 내 죽음을 이뿐이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뿐이 알면 슬퍼 못 견딜 거라는 유언과 함께 이뿐이를 그리며 웃으면서 임종한 할아버지. 생의 끝자락에 그리움을 세워둔 자, 그리움의 미소로 생을 마감했다.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