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이 자리에서 새삼 이미 50여 년 전에 타계한 제임스 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유 없는 반항>에 나오는 이른바 ‘치킨 게임’ 장면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치킨 게임은 누가 겁쟁이인가를 가려내는 담력 싸움이다. 자동차를 전속력으로 마주 달리다가 먼저 핸들을 꺾는 사람이 치킨(겁쟁이)으로 낙인 찍히는 게임이다.
<이유 없는 반항>에 나오는 치킨 게임은 깎아 지른 듯 높은 절벽 위에서 자동차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추어 서는 게임이었다. 벼랑 끝에 가장 가까이 차를 몰고 간 사람이 승자가 되고 먼저 멈추어 서거나 차에서 뛰어내리면 겁쟁이가 된다. <이유 없는 반항>에서의 치킨 게임은 벼랑을 향해 전 속력으로 달리던 10대 폭력서클의 보스가 자동차와 함께 높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으로 마감된다.
이명박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 싼 한 달여 동안의 여야 간 줄다리기는 자존심 싸움 또는 오기 싸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정부조직을 둘러싼 이 싸움은 한나라당에서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대결했던 이명박-손학규가 갈라선 이후 처음으로 벌인 힘겨루기였다. 한솥밥을 먹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마주 선 여·야의 사령탑이자 야전 지휘관이 되어 벌인 정치적 치킨 게임이었다는 얘기다.
벼랑 끝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되돌아 선 손학규 대표의 전격회군으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누더기일망정 되살아났지만 이번 치킨 게임은 양쪽이 다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닌 어정쩡한 싸움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한나라당이나 통합민주당은 이번 싸움에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측은 반대당과의 첫 번째 기싸움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상대방을 제압, ‘작은 정부’ 공약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승리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손학규 쪽은 이번 협상에서 강경노선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돌아온 탕아’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고 선명 야당 보스로서의 입지를 다졌기 때문에 자신들이 승자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면 이번 싸움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그래서 양쪽 모두가 패자(敗者)가 된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명박 쪽은 공약으로 내걸었던 ‘작은 정부’를 관철했다지만 18부 2처가 15부 2처로 겨우 3부 2처를 줄였을 뿐이다. 임기도 시작하기 전에 정치력 부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손학규 쪽은 선명야당 지도자의 이미지로 당내 기반을 다졌다지만 총선전략 때문에 대선에서 530만 표 차이로 승리한 새 정부의 출범을 발목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파동에서 우리 정치인들은 벼랑 끝까지 달리다가 추락 직전에 극적으로 멈추어서는 치킨 게임식 정치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소모적 싸움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이 같은 대치정국은 ‘정치적 흥행’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민주정치에 대한 염증과 함께 국민들의 가슴속에 정치적 허무주의의 씨앗을 키운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