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내가 목마름일 때 한 모금의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내 생명을 살리는 신성한 성수(聖水)다. 내가 배고픔일 때 한 그릇의 밥은 그저 밥이 아니라 내 생명을 살리는 하늘의 만나다. 내가 두려움일 때 나와 함께 하는 친구는 그저 한 사람이 아니라 내 생명을 살리는 도반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게 별 거 아니라는 그 체험이 나를 ‘나’라는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는 별 거인 체험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시간이 이리 쏜살같으니 평생도 이렇게 하룻밤처럼 흘러버릴 것 같다. 벚꽃 그늘에서 저 멀리 봉우리로 올라오는 하얀 목련이 보이고, 진달래가 보인다. 봄산은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그런데 저 아름다운 꽃들은 며칠을 갈까. 꽃피는 모든 존재는 꽃지며 날아오르는 모든 존재는 추락한다. 그러나 사랑이 이별까지 사랑이듯, 꽃은 지는 것까지 꽃이고 영웅은 저 강렬한 최후의 몰락까지 영웅이 아닌지.
이상하다. 평화는 추락과 몰락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저 낮은 자리에 있다. 내가 별 거 아니구나 하는 체험을 넘어 ‘나’를 잊고, 그리하여 내 앞에 나타나는 것과 내가 둘이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될 때 마침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그 경지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을 만큼, 그리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이렇게 하여 만물은 그에게 멸망의 계기가 될 것이다.”
저 멸망과 추락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눈물겨운 그림을 나는 토요일 오후 해인사에서 보았다. 수많은 스님들이 그 넓은 도량을 돌며 두 시간 이상을 삼보일배를 하는 것이었다. 무릎을 꿇은 스님들의 모습이, 그 스님들을 따라 무릎을 꿇은 신도들의 모습이 너무나 장엄해서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토요 삼보일배를 이끄는 해인사 강주 법진스님의 짧은 말이 강렬하다. “경전공부는 치열하게, 수행은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아마 공부가 치열할수록 수행이 단순해질 수 있는 모양이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천천히 가는 겁니다. 아무 생각도 없어요. 주변도 의식 못하죠. 의식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면서 자신의 몸을 살피고 자신을 살피는 건데. 그러다 보면 흙냄새도 구수하고, 개미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가 않지요. 현대인들은 글자 공부가 모자라지 않아요. 단순하게 ‘나’를 내려놓은 공부가 부족한 거지요.”
이 봄날 토요일과 일요일을 해인사에서 보내보는 것은 어떨지. 토요 삼보일배를 하면서 나를 내려놓아보고 하룻밤 해인사에서 잠도 자보고, 일요일은 12시부터 주지스님과 함께 침묵 속에서 걷는 자비행선도 참여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