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부잣집 양반가에서 태어나 뼛속 깊이 자존을 배웠으나 본능적인 어미사랑을 잃어버린 그녀. 마침내 그녀를 목숨처럼 보호해주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모든 재산을 빼앗겼으나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스스로의 지혜로 그 모두를 회복한 그녀. 뼛속 깊이 체화된 자존의 힘으로 세상과 맞서 싸우며 자기 속의 한을 에너지로 돌려쓴 서희는 상처로 인해 쓰러지는 인물이 아니라 상처로 인해 강해진 한반도의 아테나였다. 20대의 우리는 <토지>의 서희에게 얼마나 매료되었었는지. 그녀는 생이 행과 불행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 우리 시대의 스승이었다.
서희의 어머니, 박경리 선생이 세상을 떴다. 선생은 죽는 날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고 생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작가였다. 그리고 보니까 서희의 자존심은 박경리 선생을 빼어 닮아 있다. 서희가 농경사회에서 대지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지키려 했다면, 농경사회가 지나간 자리에서 선생은 문학을 업으로 삼고 문학적 감성을 지키려 했다. 평소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기계문명에 중독된 감성은 가짜다! 자본주의가 활성화시킨 거품욕망이 풍요롭고 신비한 생명의 본능을 벗어나 있듯 본질적인 생명의 본능에 잇대있지 않은 감성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라는 그 단호함으로 구체적인 인물을 야단친 적은 없지만 그 단호함으로 자기문학의 초석을 세운 박경리 선생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아름답고 신비한 생명의 향기를 실어 나른 인간 중의 인간이었다. 암에 걸렸어도 기를 쓰고 암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손님처럼 받아들였던 선생에겐 어쩐지 죽음조차 자연스러운 듯 느껴진다. 선생의 죽음 앞에선 인생이 덧없는 거라는 고백이 나오는 대신 인생은 아름다운 거라고 고백하고 싶어지니 이 무슨 노릇인지.
아마도 선생에겐 삶뿐 아니라 죽음조차 친구였던 것은 아닌지. 티베트의 스승 소갈 린포체가 말했다. 삶뿐 아니라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우리가 삶의 요소라고 말하는 것, 그러니까 일, 배우자, 가족, 집, 친구, 신용카드 등 안전한 삶을 위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일시적인 버팀목일 뿐이라고. 저 친숙한 버팀목이 제거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우리는 모르는 바로 그 사람, 우리가 평생 동안 함께 살아왔지만 결코 만나본 적도 없고 만나기를 원치도 않았던 바로 그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저 낯선 사람을 친숙하게 맞이할 줄 아는 것이 ‘성숙’일지도 모르겠다. 성숙한 영혼에게 죽음은 상실과 소멸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단지 변화일 뿐인지도. 그러니 죽음에 도취할 것도 절망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것이겠다.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는 죽음에 도취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은 성숙한 영혼의 맑은 노랫가락이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