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경영하는 분들인데, <명상록>이요?”
“예, 요즘 우리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서요.”
아주 가끔 외부강의를 한다. 그런데 요즘 달라진 풍경이 사업하는 사람들이 정통 철학 강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나는 경영인들에게 명상록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까지 강의를 해보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분야가 다르니 평소엔 만날 일도, 만날 인연도 없는 사람들과의 경험이었다. 그런데 왜 기업하는 사람들이 정통 철학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지만, 사는 데 특정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실존주의를 몰라도 ‘나’는 누구인지 물어볼 수 있고, 카뮈를 몰라도 기꺼이 자유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 갈구하게 되는 것은 철학이라는 학문 이전이니까.
그렇게 강의를 해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기업에서 인문학을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들은 인문학의 바다에서 새로운 경영의 노하우를 끄집어내고 싶어 했다. 무한경쟁시대를 헤쳐 가는 경영인들의 생명력이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그들은 무엇이 이윤창출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 경영인으로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육감으로 알았다.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달랐다.
인문학이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리를 배우면 영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고, 역사를 알면 조직모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고, 예술작품을 배우면 광고 만드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문학의 궁극은 쓸모와 관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궁극은 자기성찰이니까. 다른 의도가 끼어들면 드는 만큼, 많이 보고 많이 들어서 많이 활용하려 하는 만큼 이상하게도 ‘나’는 그만큼 조급해진다. 뭔가 더 활용하기 위해 뭔가를 더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뭔가를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에선 풍요로움의 노예고 다른 한편에선 강박증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만나지 않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하는 현대인들은 그만큼 불안한 것이고, 가난한 것이고 남루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보지만 자기를 보지 못하고, 많은 얘기를 듣지만 자기 얘기를 풀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에 혹사당하는 것이고, 화면에 혹사당하는 것이다. ‘자기’ 공부를 위해서는 보지 않는 시간, 듣지 않는 시간, 만나지 않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진짜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의도를 가지고 보지 않고, 의도를 갖고 듣지 않는 것으로 ‘나’를 풀어주고, ‘나’를 기다려줘야 한다. 사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수억 년 세월이 만든 시간의 보고(寶庫)고, 세상의 모든 생명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연의 보고다. 그러니 ‘나’를 풀어주고 기다려주기만 하면 ‘나’는 알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답일지! 세상을 모두 얻는다 해도 나를 잃으면 그 무슨 소용이냐는 예수의 반문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곱씹어야 할 물음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