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라뇨? 기득권 정당에 대한 압박이죠”
서울시장 선거에서 페미니스트를 표방한 신지예 녹색당 후보가 득표율 3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신지예 후보 페이스북 캡처.
신 후보에 대한 지지는 특히 젊은 층에서 두드러졌다. 6월 14일 한국YMCA와 ‘18세 참정권 실현을 위한 6·13 청소년모의투표 운동본부’가 밝힌 청소년이 직접 뽑은 17개 시도 단체장과 교육감 투표결과에 따르면 신지예 후보는 36.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박원순 당선인(33.3%)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신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같은 당 고은영 후보도 이번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에서 3.53%의 득표율로 무소속 원희룡 당선인(51.72%),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후보(40.01%)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신 후보는 6월 14일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 “기적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불신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라며 “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 페미니스트 정치의 시작점은 제로가 아니라 1.7%이기 때문”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전문가들은 신 후보의 선전을 단순한 호기심이나 선거 포스터와 관련된 해프닝 때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분석한다. 페미니스트를 전면에 내세운 후보를 8만 명이 넘는 시민이 지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높은 수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권수현 부대표는 “2015년 페미니스트 선언,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미투 운동 등이 이어지며 여성들은 자신이 직면하고 문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정치인에게 지지를 표명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며 “많은 분들이 실제 당선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항상 후순위로 밀리는 여성 의제를 대표할 사람이 있고 우리는 그를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 후보를 지지한다는 20대 여성은 “이번 더불어민주당 광역단체장 공천결과만 봐도 중년 남성 중심의 정치 체제를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게 딱 보인다. (반면 신 후보는) 기존 기득권 정당이 반영하지 못하는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고 생각한다”면서 “누군가는 사표라고 하겠지만 그런 논리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를 전면으로 내세운 후보가 이슈가 되고 많은 지지를 얻는다면 기득권 정당들도 변화의 압박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수요는 여성 후보자에게만 투표하겠다는 온라인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6월 13일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서는 ‘#투표용지에_여성정치인’이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확산됐다. 무효표도 정치에서 중요한 참고수단이므로 자신의 지역구에 여성 후보가 없을 경우 투표용지에 ‘여성정치인을 원한다’는 글자를 써서 무효표로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정치적 권리에 대한 포기이자 여성정책을 더욱 후퇴시키는 행동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가정·노동 문제에 주목한 기존의 성평등 공약과 달리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화두가 되는 주제를 공약으로 끌어온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신 후보가 내세운 ‘불법촬영 피해자 지원조례 제정’ 공약이 대표적이다.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으로 불거진 성별에 따른 편파수사 논란은 수만 명의 여성들이 모인 혜화역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신 후보는 5월 13일 ‘성차별 없는 경찰수사 촉구 기자회견’에 발언자로 나선 데 이어 선거기간 동안 경찰서와 검찰청에 불법촬영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게시하기도 했다.
이공계 여성을 지원하고 젠더 다양성을 높이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의 이진주 대표는 “기존의 여성 후보들은 일종의 남초 커뮤니티인 정계에서 얼굴마담이나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강요받아 왔다”며 “하지만 녹색당의 신지예, 고은영 후보는 남성들이 규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유명해지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굴한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이 점이 기존 여성 후보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라고 말했다.
페미니스트를 내세운 신 후보의 활약과 달리 이번 선거에서 여성 후보자들의 당선율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장 당선인 226명 중 3%인 8명만이 여성이다. 일단 여성 후보자 수 자체가 7개 광역단체장 후보 71명 중 6명, 기초단체장 후보 749명 중 35명으로 적었던 것이 근본적 원인으로 지적된다.
권수현 부대표는 “일단 각 정당에서 여성을 공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정당은 후보자의 인적 네트워크를 공천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치 네트워크 기반이 약한 여성 정치인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며 “이번에 민주당 내에서 여성의 전략 공천에 대한 반발이 컸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천에 있어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외에도 후보자의 능력과 그 사람이 가진 정치적 가치와 이상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