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교수 | ||
상투적이긴 하지만 새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희망’이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새해’에는 많은 희망과 기대를 싣고 시작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진다고, 된다고 믿으라고, 그러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그것이 삶의 비밀이라고 우리는 또 얼마나 우리의 욕심을 희망으로 포장했는지.
그러나 욕심으로 채워진 희망은 또 한없이 약한 법이어서 쉽게 분노가 되고 포악이 되고 절망이 된다. 더구나 우리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냥갑 같은 빌딩에서 온종일 보내야 하는 사회에서는! 높은 아파트에서 먹고 자면서, 빌딩에서 하루 종일 갇혀 지내면서, 화면을 보고 의사소통이라는 걸 하면서 무슨 가능성을 믿고 무슨 생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데, 또 채워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을 때 그 사회를 채우는 희망의 노래는 얼마나 많은 덫을 숨기고 있는지.
가까운 이의 아이가 당연히 되리라 생각했던 학교의 합격통지서를 받지 못해 아이도, 부모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아이의 엄마가 찾아와서 아이가 방문을 걸고 나오지 않고 있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소연을 해왔다. 초조한 부모는 이런 상황 저런 상황을 제시하며 자기 아이를 위해 준비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라고 했다. 내 아이가 아니어서 쉽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초조한 상황에서의 선택이 삶의 열쇠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또 다른 ‘선택’보다는 기다림이 먼저다.
절망의 상황에서는 절망하게 만든 희망도 놓고, 또 다른 희망도 쫓지 않고 그저 견디는 것, 견딜 만해질 때까지 견뎌야 한다. 그것이 기다림이다. 인내를 모르는 희망은 쉽게 무기력의 원천이 되고, 기다림을 모르는 선택은 쉽게 파괴의 에너지로 변질된다.
현대인들은 진짜 기다릴 줄 모르고 기다려줄 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그리고 상황에 대해. 속도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에서 기다림이야말로 맞지 않는 불필요한 가치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도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에 생을 그대로 내맡겨 생이 속도에 쓸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기다려주는 시간, 스스로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명상을 하든, 청소를 하든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행위들, 관계들, 감정들을 마치 남의 삶인 양 바라보고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축년 소의 해가 아닌가. ‘나’는 무엇에 묶여있는지, 무엇을 향해 돌고 있는지, 무엇을 견뎌야 하고 어디서 무엇을 풀어주어야 하는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삶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해에는 마음 속에 맺힌 것을 풀며 자연처럼 풀어지며 살고 싶다.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