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더욱 이상한 것은 우리 헌법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에 관한 규정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거기에 근거한 원로회의는 온데간데없고 새로 위대한 국민을 위한 원로기구가 발족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 90조는 대통령 자문기구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로회의의 의장은 전직 대통령이 되며 전직 대통령이 없을 때는 대통령이 지명한다고 되어 있다. 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에는 모두 다섯 분의 전직 대통령이 계신다. 그런데도 그중에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은 분은 한 분도 없다. 국가원로회의가 없으니 의장이 있을 리 없다. 3월 1일에 60명의 원로들이 모인 자문기구의 명칭을 ‘위대한 국민을 위한 원로회의’라고 한 것도 헌법에 있는 국가원로 자문회의 명칭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1월, 퇴임을 앞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세 명의 전직 대통령과 한 명의 대통령 당선자를 초청, 백악관에서 오찬을 했다. 그 자리에 공화당 출신은 부시 대통령 부자 두 명뿐이었고 카터, 클린턴 전 대통령과 오바마 당선자 등 세 명은 모두 민주당 출신이었다. 이들 다섯 명 전·현직 대통령이 한자리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대한민국에는 미국보다 더 많은 다섯 명의 전직 대통령과 한 명의 현직 대통령이 있지만 이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렇게 된 데는 이 분들의 정치적 배경과 신념이 서로 다르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대통령이 전임자를 비판하고 업적을 부정하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해 온 우리의 불행한 정치풍토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규모가 큰 국가적 행사에 참석할 때도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앞만 보고 있을 뿐 마주보고 환담하는 일이 거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네 정치풍토가 이렇다보니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원로회의 의장으로 모시고 국정에 관한 자문을 구한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전직 대통령이 그동안 무슨 원로기구에 참여하거나 신문 방송 등에 ‘원로’나 ‘나라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전직 대통령은 우리사회의 원로가 아니라는 얘기다. 전직 대통령이 국가원로로 대접받지 못하고 나라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특정 정파의 막후 보스로 남아있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명동성당 앞도 모자라 충무로까지 늘어서 ‘나라의 큰 어른’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는 인파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전직 대통령이 대접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우리 정치사의 일그러진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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