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아이들은 얼마나 민감한가? 아이들은 다 듣고 있다! 엄마 덕택에 나는 남자가 일단 키가 크면 싫었다. 실속이 없을까봐. 나도 실속이 없다는데 남자까지 실속이 없으면 큰일이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니까 사정이 달라졌다. 집에서는 여자가 큰 것이 가치가 아닌데, 사회에서는 가치였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가슴을 펴고 걷기 시작했다. 열등감이 우월감이 되었다. 90년대가 되니까 갑자기 세상의 학생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165cm의 내 키는 작지 않은 키였을 뿐, 더 이상 멀대처럼 큰 키가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실감했다.
옛날에 우리의 문관들은 남자들에 대해서까지 키 큰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면 다리품을 팔아먹게 되는 팔자라고, 양반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숏다리’라고 비하한다.
현대사회는 아름다움까지 기호화하고 상품화한다. 아름다움은 차이의 질서 속에서 기능하는 잉여적 개념이다. 현대사회는 선언한다. 아름다움 자체는 없다고. 존재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이라고. 그래놓고 그 관념을 기호화하고 상품화한다. 사실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데 작은 키가 문제될 게 뭐 있겠는가. 그런데 어느 순간 남자가 170㎝는 되어야지, 하는 낭설이 퍼진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160㎝, 165㎝, 168㎝, 175㎝, 178㎝, 180㎝…. 등의 기호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 숫자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의 말대로 상이한 것들의 차별성 속에서 의미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원래 사는 데 필요한 키, 예를 들면 150㎝를 무화시켜버리고, 30㎝라는 과잉 신장들의 차이의 질서 속에서 우리를 평가하고 규정해버린다. 그 차이의 질서는 한편에선 콤플렉스를 만들고 다른 한편에선 콤플렉스의 그림자인 우월감을 생산한다. 우리 모두 기호화된 관념에 놀아나고 놀아난 대가로 키 크기 위한 온갖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도 운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성장 호르몬을 투여하고, 키높이 구두를 신고, 잘 걷지도 못하게 하는 전족 같은 하이힐을 늘 신고 다니는 것은 어떤가? 내가 나를 볼 때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애정을 갖고 보는 것이 아니라 평가당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모자라다 하는데 남이 나를 인정해줄 리가 있는가.
이제 나는 작기 때문에 좋은 사람도 없고 크기 때문에 좋은 사람도 없다. 이제는 사람이 보이고 성품이 중요하다. 외모나 키는 바로 그 삶을 지시하는 특징일 뿐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험하고 우리들은 약하니 우리들이 그 생각을 몸으로 익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야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