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누가 미다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보고 비웃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세상은, 세상 속의 우리는, 우리 속의 나는 모두 모두, 황금의 손을 달라 빌고 있는데. 그런데 미다스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황금이 되고 나서야 저 치열한 탐욕의 의지를 씻고 또 씻어 내렸는데, 우리에게는 무엇이 저 의지를 거두게 할까?
처음엔 한반도에 대운하를 하면 안 된다고, 대운하는 대재앙이라고 시작했다, 오체투지단의 오체투지는. 그러나 지리산 하악단에서 시작한 오체투지가 남원, 전주, 공주를 거쳐 오면서 그저 오체투지만 남은 것 같다. 죄인처럼 넘어져서 벌레처럼 기어가는 오체투지의 힘은 저항에서 시작했어도 저항에 머물지 않고 삶 사랑, 생명 사랑으로 흐르는 것이다.
나도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체투지단을 따라 오체투지를 하려 한다. 현대인은 머리를 많이 쓴다. 이성과 논리로 중무장하도록 배운 것이다. 나부터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바람에 얼마나 중요한 것을 잃고 또 잃고 있는지. 무엇보다 감각들이 무뎌지고 직관이 힘을 잃었다. 오체투지는 그 감각들을 깨우는 시간이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무뎌진 몸을 던져 몸을 회복하고 그럼으로써 마음을 회복하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처음엔 죽비소리, 북소리에 맞춰 몸을 던졌는데, 자동차 소음이 시끄러운 대도시로 들어오고 나서는 그것이 징으로 바뀌었다. 징소리에 맞춰 몸을 던져 일으키는 것이다. 몸을 던져 일으키다 보니 호흡이 가쁘다. 호흡이 가쁘니 호흡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세상도 잊고 나도 잊은 채 그저 호흡이 되어 있다.호흡이 되어 바람을 느껴보면 알겠다. 바람은 몸 밖의 호흡이고, 호흡은 몸 안의 바람이라는 사실을. 내 안에 넘쳐나던 욕심이 바람에 쓸려가고, 흐르지 못해 울체되어 있던 분노와 불안이 호흡을 통해 홀가분해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몸을 던지고 일으키는 오체투지에 생산성이 있을 리 없다. 몸을 던져 일으키는 단순한 반복은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황금으로 환산해주지 않는 쓸모없는 행위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아스팔트는 얼마나 뜨거운가. 아스팔트 위에 오체를 뻗고 엎어져 있으면 뱃가죽이 뜨끈뜨끈해지면서 미운 사람도 없고, 안쓰럽지 않은 생명도 없다. 우연히 만나는 개미도, 지네도 예사롭지가 않으니까. 모두가 사랑이고, 모두가 눈물이다.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전종훈 신부가 이끄는 그 오체투지단이 16일, 서울의 문, 남태령고개를 넘어온단다. 시끄러운 세상에 쓸려가지 않고 스스로의 세상을 돌보게 만드는 오체투지단을 따라 남태령고개를 넘으면서 지금 우리가, 내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는지.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