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 ||
황석영 선생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중에 김지하 선생이 한마디 던졌다. 좌든 우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다! 그 발언은 불난 집에 석유를 부은 것처럼 논쟁에 논쟁을 낳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게는 김지하 선생의 그 발언이 황석영 선생에 대한 두둔으로 들리지 않은 것이. 나는 그 말을 김지하 선생의 내공으로 느꼈다. 아침마다 변하는 게 작가인데, 기억력이 강할수록 엉터리 작가라는 김지하 선생은 역시 시인이었다. 삶의 내공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으면 그가 누구든 그는 예술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구시대의 낡은 유물인 냉전체제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황석영 선생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냉전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 아니, 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벗어버린 한 시대의 병을 유독 한반도만 벗어버리지 못하고 보물처럼 안고 있는 것이다. 그 병을 치유하기 전에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용서는 망각이지만 망각하기 위해서도 상처치유가 우선이니까.
나는 궁금하다. 저 상황에서 황석영 선생이 어떤 선택을 해갈지. 그는 그 많은 화살을 맞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자기배반의 길을 갈까. 그런데 그와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김지하 선생의 말이 귀속을 웅웅거린다.
“아침마다 변하는 게 작가인데, 기억력이 강한 작가일수록 엉터리 작가고,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다.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게 작가다.”
작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스무 살 때 진리라 믿었던 것을 40에도, 50에도 그대로 기억하고 믿고 있다면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편협하고 완고한 사람이다. 어제의 기억을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야 삶이 새로워진다. 믿음과 습관이 바뀌어야 친구가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새로워지지 못하는가? 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무엇에 붙들려 있는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갱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과거가 명치 끝에 걸려있으면 스스로 발목을 잡는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바뀔 수 없는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된다.
집착한다는 것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고, 충분히 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세월이 이만큼 와버렸는데 그때 그 시절에서 한 치도 건너오지 못한 사람의 삶은 썩고 있다. 나는 무엇에 붙들려 있을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명치 끝에 걸려 있다. 명치 끝에 걸린 것이 홀연히 빠져나오기 전에 삶은 새로울 수 없다. 그것이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이유다.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