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상실감 그 자체였다. 진정한 상실감은 저런 것이었다. 허망하고 황망한 것,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발 뻗고 통곡하는 것! 꽃잎처럼 진 님이 너무너무 아까워서, 억울하게 가신 님이 너무너무 애통해서, 깨끗하게 가신 님이 너무너무 보고파서, 지켜주지 못한 우리의 비겁함이 너무너무 미안해서 꽃잎이 되신 님을 받아내는 눈물의 강이 된 것이다.
‘상록수’는, ‘아침이슬’은, ‘사랑으로’는 아리고 애리게 불러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님을 위한 행진곡’이 그렇게 애절할 수 있다는 건 예전에 미처 몰랐다. 명치 끝에 맺힌 못다 한 말, “사랑합니다!”
님은 갔지만은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사랑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를 외치며, 울며불며 사람의 강을 이룬 사람들! 어떻게 그는 우리 모두의 님이 된 것일까?
연인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계산기가 동원되는 얄팍한 시대, 진정성까지도 ‘경제’에 엿 바꿔 먹은 시대, 그는 우리에게 진정성의 실체를 보여주고 갔다. 사랑의 실체를 본 프시케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처럼 진정성을 본 이들을 진정성을 만나게 해준 그를 마음 속에 깊게 각인하는 것이다. 이현세의 까치 같은 그를. 그가 오로지 고독만 남은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모든 것을 안고, 지고, 몸을 던져 자존감이 무엇인지 몸 바쳐 보여주던 날, 우리는 모두 망연해졌다. 모두 슬픔이 되어, 슬픔만 되어 슬픔으로 하나가 됐다. 이라크파병 때문에, 스크린쿼터 때문에, 한미 FTA 때문에 정책적으로 대립각을 세웠던 사람들도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그의 인간미에는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렸다.
눈에 보이는 이해관계 때문에 영악하게 굴지 않아 ‘바보 노무현’이 됐던 그가 자존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목숨을 건 것이다. 바보다, 진짜 바보다! 그런데 파르시팔 신화를 보라! 바보가 살지 않은 성(城)은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구원은 순진하고 솔직하고 우직한 바보에게서 온다. 그리하여 그 바보 노무현을 위해 국민이 제단을 마련한 것이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제단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먹고 사는 일이 일의 전부인 양 굴었던 태도를 참회하고, 나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태도를 참회하고, 권력에 눌리고 권위에 눌리고 돈에 눌린 얄팍했던 우리의 삶을 참회한 것이다. 미안해요, 그러니 일어나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러나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느냐며 누워버린 그의 육신은 불 속으로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세상에, 세상에!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가 어떻게 일어날까? 우리는 바보 노무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