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 이광훈 | ||
정부는 한글발음을 알파벳으로 적는 로마자 표기법을 또 개정할 모양이다. 지난 2000년에 개정할 때도 로마자표기는 딱 부러진 정답이 없는 데다 자음과 모음 다 합쳐서 40개나 되는 음절단위를 26개밖에 안 되는 로마자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자 표기법을 고쳤던 정부가 개정한 지 채 10년도 안 돼 또 다시 대대적으로 손질하겠다는 것이다. 표기법이 바뀌었는데도 외국의 간행물이나 지도는 우리의 개정된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종전 표기법을 쓰고 있는 데다 인명, 회사명, 단체이름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로마자 표기법 개정이 확정될 경우, 그동안 새로 바꾸어 달았던 Busan, Jeju, Gimpo 등의 도로표지판을 다시 Pusan, Cheju, Kimpo로 고쳐서 달아야 할 판이다. 더군다나 김포는 그동안 외국인들이 ‘짐포’로 발음했다며 잘못된 로마자 표기법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어 지금까지 통용되던 도로표지판은 물론 비행기 시간표나 대외용 홍보물까지 대거 폐기처분될 처지에 놓여 있다. 표기법의 주무부서인 문화부는 너무 자주 어문규범을 손질하는 데 부정적이라지만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정권차원의 대의명분 앞에 언제까지 버틸지 의문이다.
며칠 전 국립국어원은 성씨(姓氏) 로마자 표기법 제2차 시안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 시안이 원안대로 확정되면 지금까지 여권(旅券)에 자신의 성을 ‘Lee’라고 표기해 온 98·5%의 이씨들은 영문 성씨를 ‘Yi’로 바꾸어야 하고 박씨도 ‘Park’ 대신 ‘Bak’으로 고쳐야 한다. 일제의 창씨개명 파동 70여 년 만에 로마자 창씨개명 사태를 맞게 된 셈이다. 다만 김씨나 강씨는 대부분 Kim이나 Kang을 써왔기 때문에 바꾸지 않지만 ‘죄’라는 뜻을 가진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신씨와 노씨는 ‘Sin’과 ‘No’로 통일하기로 했다고 한다.
시대가 달라지면 로마자 표기법을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경쟁력 강화도 좋지만 한 나라의 어문규범을 채 10년도 안 돼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의 대외신인도(信認度)를 훼손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 번 바뀐 어문규범이 해외에까지 뿌리내리는 데는 수십 년, 때에 따라서는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중국은 수도 북경(北京)의 영문표기를 오래전부터 베이징으로 바꾸었지만 대부분의 영어사전은 아직도 ‘Peking’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기 바란다.
언론인 이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