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복거일 | ||
우리 사회의 전통은 고인의 행적과 일화들을 길게 소개한 글을 새기는 것이었다. 비명이 대체로 짧은 운문으로 된 서양의 전통과는 다르다. 애사(哀詞), 뇌문( 文), 행장(行狀), 묘지(墓誌), 제문(祭文)과 같은 글들이 모두 길다. 요즈음은 서양의 전통을 따르는 추세다.
서양의 대표적 비명은 “편히 쉬소서”(RIP:Requiescat in pace)다. 삶은 힘들므로,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비명이다. “그대 위에 흙이 가볍게 얹히소서”도 로마시대 이래 흔히 쓰여온 비명이다.
비석에 실제로 새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비명들도 많다. 가장 유명하고 감동적인 것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싸웠을 때 테르모필레에서 죽은 스파르타 군인 300명을 위해 시모니데스가 지은 비명일 것이다.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말하시오, 지나가는 그대여, 그들의 법을 지켜 우리는 여기 누웠노라고.”
한 사람의 삶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이는 물론 당사자다. 그래서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잘 요약한 비명을 찾아보게 된다. 그런 자작 비명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은 영국 시인 키츠의 “그의 이름이 물로 쓰여진 사람이 여기 누워있다”(Here lies one whose name was written in water)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면, 누구나 아쉬움을 맛보게 되므로, 키츠의 자작 비명은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긴다.
키츠의 자작 비명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에 나오는 “사람들의 악행들은 청동에 새겨져 남지만, 그들의 선행들을/ 우리는 물로 쓴다”(Men’s evil manners live in brass; their virtues/ We write in water)는 구절에 빗댄 것이다. 그러나 그 비명은 훌륭한 작품들을 남긴 시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다행히, 그의 비석엔 그의 친구 셸리의 <아도나이스: 존 키츠의 죽음에 대한 비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이제 그가 한때 아름답게 만들었던/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He is a portion of the loveliness/ Which once he made lovely.)
유서를 쓸 때의 노 전 대통령의 심경은 어쩌면 키츠의 심경과 비슷했을 터이다. “아주 작은 비석”을 세우라고 당부한 데서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아무런 비명을 넣지 않기로 한 결정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아쉽다. 노 전 대통령에겐 반항적 풍운아의 면모가 있었다. 생시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이 사라지면, 그런 면모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그의 반항적 풍운아의 면모를 드러낼 만한 시구 하나를 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체제에 반항적이었던 중세 유럽의 시인 프랑스와 비용의 시구를 뇌어본다. “작년의 눈은 지금 어디 있는가?” 길게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은 작년의 눈처럼 된다. 그리고 그들의 비명은 물로 쓰여진다. 삼가 명복을 빈다.
소설가 복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