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선의에서 사랑을 부여한 게 아니냐고? 자연은 그렇게 호의적이 아니네. 자연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한 게 아니냐고? 자연에겐 이런 인간적인 환상이 필요 없네. 자연은 다만 창조하고 파괴할 뿐일세. 그게 자연의 임무이지. 자연은 계획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냉혹하고, 그 계획이 인간을 넘어서기 때문에 무심하네. 자연은 인간에게 정열을 선사하고도 그 정열이 절대적일 것을 요구하네.”
그렇게 정열의 속성을 잘 알면서도 페터는 쉽게 유디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부르주아적 취향과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를 선뜻 자기 삶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페터는 용기 없는, 비겁한 사랑의 전형이다. 그러면 유디트는 가만히 있었을까? 사랑하면서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다고 재단하고 평가하고 방어하는 남자에 대해 그녀는 도도하게 심술을 부리며 파괴적인 사랑이 어떤 건지를 일생을 통해 보여준다.
페터는 니체가 말하는 평균인이다. 니체는 선하다는 자들, 의롭다는 자들을 믿지 않으며, 민주주의적 취향과 예절을 갖춘 평균인을 증오한다. 일반적으로 평균인은 특정문화에 잘 적응돼 합리적인 시민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리에서 떨어지는 고독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고독하게 자기 자신을 대면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하다는 자와 정의롭다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런 자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고안해내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못 박아 처단한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익숙하게 추구했던 가치들에 멀미를 느낀 적은 없는가?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시신이 되어 내 안에서 내 바깥으로 치워지는 것을 경험한 적은 없는가?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 그동안 그릇된 것이라 믿었던 가치들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그릇된 것이라 배우고 익힌 가치들이 더 이상 두려운 금기가 되지 못하고, 그동안 옳다고 믿어진 가치들이 편협하기 그지없는 망상으로, 낡아빠진 자부심의 원천으로 판명 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선포한다.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진부한 망상이 있다고. 그리고 단언한다. “저들은 낡아빠진 자부심 하나를 갖고 있었다. 저들 모두는 사람에게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모른다!”
창조하는 자만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똑똑히 안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 창조하는 자는 선과 악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까? 이번 달 24일, 오후 2시부터 충남대학교 인문대학에서 한국 니체학회 추계학술대회가 열리는데, 주제가 ‘니체의 정치철학과 윤리의 문제’다.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단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