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 여학생은 자신의 큰 키가 자부심의 원천이었나 보다. 그 자부심을 증명하기 위해 생각 없이 말을 쏟아낸 것이리라.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루저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그동안은 낯설었던 서구적인 영어단어가 그 여학생의 지적 허영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적 허영심은 지적이지 못한 것보다 훨씬 추하지만 지적 허영심을 거치지 않고 지적일 수 없으니 그냥 껄껄깔깔 웃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히는 시기가 있으니까.
아니 생각해보면 “단지 지적이지 못한 것”은 추하지 않다. 사람은 얼마든지 지적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어쩌면 ‘지적이지 못한 것’은 다른 성향이 내려앉는 그릇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 지적 훈련은 낭비야, 직관력이 발달됐으니까!” “그 사람, 지적이지 않지만 감각적이야!”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른 성향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지적 허영심은 추하다. 그래서 시민들이 화가 난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대부분을 모독했으니까. 키 큰 사람을 좋아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족처럼 불편한 키높이 구두를 신어야 하는 사람들은 그 생각 없는 말에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런데 녹화방송이면서 제작진은 왜 그런 말들을 걸러내지 않았을까. 더구나 공영방송 KBS가. 그런 언어폭력을 행사하고도 그것이 폭력인 줄조차 몰랐던 것은 아닌지. 그 무감각이야말로 지금 우리 방송 오락프로그램의 일반적인 분위기인지도 모르겠다. 연예인과 일반인을 나누고,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큰 머리와 작은 머리를 나누면서 몸에 대한 농담으로 미친 듯 웃고 떠들지는 않았는지. 그런 방송 프로그램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의 젊음들은 늘씬하고 잘생긴 배우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무엇보다도 크고 잘생긴 덕택에 잘나가는 것 같은 그들을 신으로 섬기며 기독교인이 예수를 따르듯 그들을 따라 다이어트와 성형이라는 신흥 종교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젊음들은.
“키 작은 남자는…” 혹은 “뚱뚱한 사람하고는…” 식의 선입견의 공적 폭로는 폭력이다. 그런 폭력적 선입견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삶의 지향성을 만들어내는 성숙한 성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청소년들이다. 그런 선입견과 편견으로 쓸데없이 상처 받고 쓸데없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하는 젊음의 무리를 어쩔 것인가, 면역력이 부족한데. 함께 사는 세상, 바이러스처럼 떠돌며 공격해대는 그런 편견들에 껄껄깔깔 웃으며 툭툭 털어낼 수 있는 젊음은 많지 않다.
그래도 나는 루저라는 말에 화가 나고 뚱뚱하다는 말에 상처 입었을 젊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그래야 당신 속의 지혜가 드러나고 당신 밖으로 사랑이 흐르고 마침내 당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힘이 생긴다고.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