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말씀을 찾은 사제는 성서를 덮었다. 그리고 병사들을 불러 탈주병의 은신처를 말해주었고 탈주병은 끌려갔다. 마을사람들은 원래대로 평화를 찾게 해준 사제에 감사하며 잔치를 열었으나 사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헨리 나웬이 구성한 이야기다.
여기저기 화려한 성탄절 트리가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성탄절이 되기까지가 대림절이다. 대림절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다다르기를 기다리는 시기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방문한 적이 있는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대림절의 기다림을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삶과 사랑에 마음을 열 때까지.”
아기예수가 오신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신성과 사랑이 싹튼다는 뜻이리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렸던 삶의 의미고,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다는 하느님의 사랑이리라. 신성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는데, 다시 <상처 입은 치유자>로 돌아가 그 사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들여다보자. 깊은 슬픔에 빠져 침묵하고 있던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는 구세주를 넘겨주었구나. 성서를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소년을 찾아갔더라면….”
우리는 병사의 협박에 넘어간 사제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두려움에 갇히면 사랑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나마 사제의 희망은 잔치판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평소 의지해온 성서까지 동원해가며 협박에 넘어간 자신에 대해 그는 또 얼마나 자책하며 쓰라렸을까.
그런데 그 사제는 진짜, ‘나’와는 상관없는 ‘그’이기만 할까? 올해 많은 사람을 울린 그 문장,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는 우리 모두 그 사제였음을 참회하는 아픈 눈물은 아니었는지. 언제나 깨달음은 늦는 법이어서 어쩌면 우리는 특별한 존재만 기대하고 기다리다가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혹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존재의 특별성을 망각하고 있는 어리석은 존재는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한다. 그 사제가, 우리가, 그리고 내가 이 대림절에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뜻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거라고. 참 사랑을 아는 참 사람으로. 참 사랑 아기예수는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화려하게 오셔서 모든 이를 사랑한다고 떠벌린 존재가 아니다. 아기예수는, 초라하고 초라하고 초라해서 마침내 사람의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당당하고 여유 있게 인연이 있는 이를 사랑하고 치유하셨다. 참 사랑이란 마구간처럼 더러운 내 마음의 상처와 슬픔, 실망과 쓰라림을 거치면서 마음을 정화해갈 때 생기는 힘이다. 상처 입어본 자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법이니까.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