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속 탕자는 사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라 방탕한 세월을 보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철부지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나는 탕자라 할 수 없다. 책임감이 강한 장녀에다 약속 잘 지키는 모범생이 무슨 탕자겠는가. 그런데 나는 자꾸 온화한 아버지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는 아들의 모습에 시선이 끌린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기진맥진한 탕자인지도 모르겠다고. 대학 가기 위한 일념으로 지옥 같은 고3을 거쳤으나 원하는 공부를 못하게 되어 힘없이 주저앉아야 하는 젊음들은 왜 그렇게 많은가. 일하고 싶은 열정은 충천한데 청년실업이라는 시대상황 앞에서 기가 막히고 앞이 캄캄한 20대는 또 왜 그렇게 많은가. 일터에서는 명퇴를 당하고 집안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된 중년의 남자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기 위해 평생 현역을 꿈꾸며 일터에 집착해야 하는 불안한 사람들은. 21세기는, 가정은 저절로 단란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렘브란트가 궁금해져서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렘브란트와 관련된 서너 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는 알았다. 바로 저 ‘탕자의 귀향’ 그림으로 헨리 나우웬이 <탕자의 귀향>이라는 한 권의 책을 썼다는 것을. 그는 ‘탕자의 귀향’ 포스터에 매료되어 원화를 보기 위해 러시아 여행을 하기도 했다. 원화가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하루 종일 ‘탕자의 귀향’만 보고, 사흘 뒤 다시 가서 또 하루 종일 ‘탕자’를 보고. 진짜로 좋은 그림은 좋은 친구 같다. 끊임없이 나를 비춰주고 내 이야기를 털어놓게 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탕자의 아버지를 거의 장님으로 그렸다.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자의 눈이다. 과거를 규명하려 드는 냉정하고 싸늘한 눈이 아니라 기진맥진한 아들의 아픔 속으로 그저 스며들고자 하는 자의 포근한 눈이다. 그런 따뜻한 그림을 그리기까지 렘브란트는 어떤 삶을 산 것일까?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쓰고 있다.
“63년의 생을 살면서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나는 걸 목격했을 뿐 아니라 세 아들과 두 딸, 그리고 함께 살았던 두 여인의 죽음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 뼈아픈 슬픔을 단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지만 ‘탕자의 귀향’을 보면 그가 얼마나 눈물을 쏟았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고통이 없이 생은 깊어지지 않는가 보다. 눈물 없이 사랑은 성장하지 않는가 보다. 기다림 없이 생이 주는 위로의 힘을 알 수 없나 보다. 생은 원래 그렇게 고단한 것인가 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