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간평가를 둘러싸고 YS의 입장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끝낸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공화당 김종필 총재 모두의 발표 내용이 비슷 했던 것. 당시 YS는 DJ와 차별화를 시도했으며, 동해 보궐선거에선 JP와 대결 구도를 보였다. | ||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전 의원의 진술이다.
“물론 여기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째는 청와대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대중 총재의 발언 내용이다.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정권의 신임이 연계되는 중간평가는 헌법 위반이다. 비록 대선 공약이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이 헌법 위반 행위를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노태우 대통령이 이랬어요.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구상하고 있는 중간평가는 정권의 신임을 건 국민투표가 아니라 단순한 정책평가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탭니다. 보다 진전된 사태예요. 본래 우리 당은 중간평가 문제에 관한 한 유보하는 것이 최선이요, 강행하는 것은 최악이다, 이렇게 주장해왔는데 차선이자 차악이라 할 수 있는 정권의 신임이 걸리지 않은 단순 정책 평가안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당은 정책 노선에서 크게 배치되지 않는 한 노태우 정권에 협력해 나갈 것입니다.’
말만 그랬던 게 아니다. 이 날의 정상회담 이후 민정당과 평민당의 협조 무드가 뚜렷해졌다. 그런 데다가 우리 통일민주당으로 하여금 의문과 분노를 자아내게 한 거는 민정당과 평민당 간에 정국 현안을 놓고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카는 정보였다.”
여기서 진술자를 바꾸어 또 다른 증언을 들어보자. 노태우 김대중 묵계설과 관련하여 이제는 고인이 된 통일민주당의 핵심 좌동영 우형우의 좌동영, 고 김동영 의원이다.
“우리 당이 노태우 김대중의 3월10일 청와대 회담을 회의적인 눈으로 보게 된 거는 회담 직후에 나온 청와대측의 발표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는 중간평가를 둘러싼 여야간의 극한 대결이나 정국 경색은 정국 상황에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따라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는 중간평가가 원만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 발표의 내용을 보고 우리가 왜 청와대 회담을 회의의 눈으로 보게 되었느냐. 그에 앞서 3월7일, 노태우 대통령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의 단독 회담이 있었다. 이때에 나온 청와대 발표가 거의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의문은 또 있었다. 청와대에서 발표한 두 사람의 대화록에는 빠져 있었지만 회담 중에 노 대통령은 김 총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김 총재, 내가 김 총재를 위해 충고를 하나 해도 되겠십니까? 우리 군부와 관계되는 내용입니다.”
“군부와 관계되는 내용이라면.”
“아 뭐 그렇게 크게 긴장하실 건 없십니다.”
“아닙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군부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긴장 안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내용의 충곱니까.”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들었십니다. 그 점에서 김 총재 역시 같은 것 아니겠십니까? 그러나 내가 보기에 김 총재가 대권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한 과정이 있십니다. 군부와의 관계를 좀 유연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어째서 그렇다고 할 것도 없십니다. 말씀 안 드려도 잘 알고 계시는 일이지만 군부의 대다수의 시각이 김 총재에 대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서 그렇십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군부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드느냐.”
“나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케 하기 위해서는 이 노태우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도와 줄 테니까 김 총재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을 수 있는 군부의 몇몇 지휘관들을 한 번 만나 보는 기 어떻겠십니까.”
김 총재가 이때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때 노태우 대통령이 김 총재에게 왜 이렇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나왔느냐 하는 거였다.
이날 노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에게 인간적 접근으로 간곡하게 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아시는지 몰라도 나는 김 총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십니다. 지난 80년 김 총재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적에 군부의 결정에 반대해서 사형은 안 된다, 이리케 제동을 건 사람이 나였십니다. 지난 87년 6·29선언을 하면서 김 총재의 사면 복권을 강력하게 건의한 것도 나였십니다. 그랬다캐서 이제 와서 그런 일들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거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김 총재가 이 사람을 도와주실 차롑니다. 도와주십시오. 못 도와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노태우 대통령의 김대중 총재 설득 내용이었다.
한편, 89년 4월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일어난 후보 매수사건의 개요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통일민주당측이 자기 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자금 5천만원으로 신민주공화당의 이홍섭 후보를 매수, 후보 사퇴를 시켰다는 것이다.
사건의 개요대로라면 그렇게 놀랄 것도 없는 단순한 사건일 수도 있다. 우리의 선거 풍토에서 볼 때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런 내용의 사건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유독 이 사건만이 마치 처음 벌어진 후보 사건인 듯 극적인 폭로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는가.
사태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 의장 황병태 전 의원이다.
“진술에 앞서 먼저 밝혀 둬야 할 사실이 있다. 89년 당시 우리 통일민주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다. 동해 보궐선거를 한 달쯤 앞둔 89년 3월 정치판의 최대 현안은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였다. 이것 때문에 2월11일의 노태우 김영삼 단독 회담을 시작으로 3월7일 노태우 김종필, 3월10일 노태우 김대중의 연쇄 단독 정상 회담이 잇달아 열렸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김종필, 김대중 양 총재로부터는 중간평가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합의나 묵계를 얻어냈다. 그러나 우리 당 김영삼 총재한테는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 부분,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 내용을 확인한 바 있다. 김영삼 총재가 중간평가를 강요한 것은 4당 체제에서 제 3당으로 전락한 통일민주당의 위상을 뒤집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내용이다.
▲ 서석재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 | ||
“당시 우리 민주당은 노태우 정권을 일종의 과도 정권으로 규정했다.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과정에 등장한 과도 정부라는 것이다. 과도 정부는 오래 놔둘 필요가 없다, 하루 빨리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는 기 첫번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국회 청문회 때 조성된 우리 통일민주당의 자신감이었다. 평민당을 제치고 제 1야당으로 부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본 거였다.
세번째는 평민당과의 선명성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YS의 뿌리깊은 고정관념이었다. 야당이 살 길은 선명성뿐이다, 평민당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선명성뿐이다, 하는 고정 관념이 중간평가 해라, 국민들에게 약속한 거 아니냐, 그런데 왜 안 한다고 하느냐, 이리케 된 거다. 그라고 네번째는….”
그 밖에도 이유는 많다.
정계 원로 C옹의 주장이다.
“흔히 그런 말들 안 하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게 바로 그 거다. 그때 우리 3김씨의 생각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아니 로마가 아니라 모든 길은 청와대로 통한다, 이래서 저마다 몸이 달았는데 실제로 89년이 어떤 해인가.
유수 같은 세월이라지만 대통령 선거가 3년밖에 안 남은 해였다. 그런데다 군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던 것이 민간인도 될 수 있다, 이렇게 되었고 87년에는 4파전이던 것이 이번에는 3파전이었다.
당선 확률이 3분의 1로 좁혀지고 보니 흥분했다. 모든 길은 청와대로 통한다, 청와대 가는 길이 눈앞에 가물가물 하는데 속이 안 탈 수 있는가.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동해시 보궐선거 신민주공화당 후보매수 사건인데 이 사건이 3김씨 하고는 어떻게 연결되느냐.
당시 민정당이나 평민당은 동해시 보궐선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거의 포기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선거의 양상은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의 2파전으로 귀착이 됐는데 그런 상황에서 왜 이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느냐.
이제 동해시 후보 매수 사건의 진상 파악으로 들어가자. 사건 당사자의 한 사람, 통일민주당 사무총장 서석재 의원의 진술이다.
먼저 기자의 질문.
“동해시 매수 사건이 일어난 지 9년이 되는데, 사건 당사자로서 우선 소감부터 말씀해 달라.
솔직히 말해서 그 사건은 해결이 아직 안 됐다. 물론 사건 자체는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났으니까 해결이 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적인 측면에서의 일이고, 정치적으로는 아직 계류 중인 것과 같다는 얘기다. 사건 당사자로서 옥고도 치렀고 또 그 사건으로 해서 서 의원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로부터 9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뭔가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흔히 서석재 의원을 가리켜 억세게 운이 없는 불운의 정치인으로 지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 당시 언론에서 말한, ‘불운의 가신’이란 정확한 표현이다.
한평생 YS의 최측근으로서 야당 정치인의 고통과 설움을 감수하다가 마침내 YS집권이라는 정치적 소망이 달성되자 죄인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아마도 그런 것을 감안했을까. 서석재 의원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꼭 한 가지 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짊어졌다, 독배를 내가 마셨다.”
시간은 보궐선거 일자가 4월14일이었으므로 그보다 며칠 앞서는 4월10일 전후한 어느 날.
장소는 서 의원이 일금 5천만원을 건넸다는 인적이 드문 동해시 어느 바닷가. 그리고 등장 인물은 후보 매수 혐의의 통일민주당 서석재 사무총장과 매수당한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
먼저 서석재 사무총장.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우리 당 김명윤 고문의 권고와 종용에 따른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이홍섭 후보.
“김명윤 고문에게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해 주도록 부탁한 일이 있다.”
“확인이 필요하다. 김 고문의 말에 따르면 이 후보는 후보 사퇴 결심을 했다는 데 사실인가.”
“사실이다.”
“사퇴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후보를 사퇴하는 데 이유까지 밝혀야 하나.”
서석재 의원의 기억으로는 이홍섭 후보가 먼저 사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