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당의 잔을 들어라..DJ와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 유 보’ 발표가 나온 후 자신이 소외될 것에 전전긍긍했던 YS.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을 통해 그것은 ‘단발 성 유착’이었음을 알게 된다. | ||
“하나는 노태우·김대중 밀약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태우·김영삼 밀약설이다. 순서에 따라 노태우·김영삼 밀약설부터 확인해 보자. 2월11일 또 한 번의 노태우·김영삼 청와대 회담이 있었다. 회담이 끝나고 나서 상도동측, 즉 통일민주당측은 회담이 결렬되었다고 발표했다. ‘아무 것도 합의된 게 없다.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 통일민주당은 오늘의 노태우·김영삼 청와대 회담의 결과를 이렇게 발표한다.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 발표엔 감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4당 체제 하의 제 3당 그리고 세 야당 중 제 2야당으로는 정국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김영삼의 불만과 분노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도동측 주장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 청와대측은 어떻게 대응했느냐. 2월11일 노태우·김영삼 청와대 회담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진술자를 바꾸어 6공 청와대 Y비서관에서 사건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의원이다.
“한마디로 청와대 발표는 정략이었다. 그날 노태우·김영삼 청와대 회담에서는 아무 것도 합의된 게 없다. 피차 받은 것도 없고 준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발표할 수 있는가. 그런 데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민정당측 반응이다. 박준규 대표는 내용은 말하지 않고 이런 말로 얼버무렸다.
‘두 분은 오찬을 겸해 자그마치 세 시간 반이나 얘기를 나누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마주앉아 얘길 했는데 설마 하니 성과가 없었겠느냐.’ 이 발언만 가지고도 이미 모종의 밀약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었는데 한술 더 떠서 이종찬 사무총장은 이런 말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하고만 만나는 게 아니다. 3월7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영수회담이 약속돼 있고, 사흘 뒤 3월10일엔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만나기로 돼 있다. 그런 일정을 약속해 놓고 있는데 김영삼 총재를 만나고 나서 이런 내용에 합의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두 분의 김 총재 꼴이 뭐가 되겠는가. 그런 이유로 YS와의 합의 내용은 발표를 유보했지만 결렬이다 또는 합의가 없었다 하는 통일민주당측 발표, 그리고 이 발표를 그대로 게재한 언론의 발표는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질 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가에서는 우리 통일민주당측의 결렬 발표와 민정당측의 대응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뭔가가 있다, 즉 노태우·김영삼 밀약설을 제기한 것이다.”
계속해서 6공 청와대 Y비서관이 증언한다. “노태우·김영삼의 청와대 회담이 열린 5월31일은 시기적으로 평민 민주 공화의 세 야당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던 그런 시점이었다.”
89년 5월 노태우·김영삼의 밀약설은 왜 나왔는가. “갈등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고 있는 5공 청산 문제, 이중엔 야 3당 총재들에 의해 5공 핵심으로 낙인이 찍힌 여섯 명 즉 이희성 이원조 안무혁 장세동 정호용 및 허문도 등에 대한 처리 문제가 포함돼 있었는데 그중의 핵심은 역시 정호용 의원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5월22일 정호용 의원은 여야 14인 중진회의 경과 보고 등을 위해 열린 민정당 의원 총회에서 세 야당의 자신에 대한 공직 사퇴 등의 요구는 개인의 신상 문제를 뛰어 넘는 역사관 차원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정호용 전 의원의 반론이다. “그러나 5월에 들어서면서 야 3당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세 야당의 목소리가 한 목소리가 아니고 저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데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그러냐. 지난 3월까지의 나의 판단은 죽는 한이 있어도 의원직을 사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야 3당이 계속해 이 사람을 몰아붙였다면 본인은 숨겨진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서 발버둥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본인은 본인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문제는 나 정호용이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국가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가치 기준의 문제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 발언에서 주목할 부분은 야 3당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3월까지는 의원직 사퇴 등 목소리가 거칠면서도 한 목소리로 집약됐으나 5월 들어서부터는 세 야당의 목소리에 조금씩 차이가 있고 전과 같이 거칠지도 않다, 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세 야당 사이에 나타난 갈등의 조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야 3당 간의 갈등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다름 아닌 두 개의 밀약설, 즉 2월11일과 5월31일 노태우·김영삼 청와대 회담에서 나온 노·김 밀약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3월10일 노태우·김대중 청와대 회담에서 나온 또 다른 노·김 밀약설이었다.
89년 당시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의원이다. “노태우·김영삼의 밀약설이 나온 것은 그 해 2월11일, 두 사람의 청와대 회담 때였다. 이 날은 청와대측이 기획한 노태우 대통령과 세 야당 총재간의 연쇄 단독 정상회담의 첫 번째 날이었는데 두 사람의 밀약설은 회담이 끝나고 발표된 청와대와 통일민주당 간의 성명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데서 비롯됐다.”
▲ 노태우-김대중 단독회담(위 사진) 결과에 불안 해하던 YS는 소련 방문(아래)을 통해 합당을 굳힌다. | ||
YS 회고록 〈나의 정치 비망록〉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중간평가를 유보 또는 연기한다는 것이지 취소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노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이다.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지금이라도 중간평가는 해야 한다. 실제로 나로서는 중간평가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약속한 일인데 어떻게 해라 말아라 할 수 있는가.’
다음은 이 날 청와대 회담의 의제였던 내각책임제 개헌 문제. 이 부분 YS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내각책임제 개헌 문제를 제기했을 때 나는 이런 말로 나의 입장을 밝혔다. 내각제 개헌 문제는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대선을 치른 지 얼마 안됐는데 그런 문제를 가지고 정국을 시끄럽게 만들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나.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서 그 문제와 관련해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이 문제는 국민들이나 야당에서 동의한다면 몰라도 정파간의 이해 관계를 이유로 해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기록 중에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나는 그 날 노태우 대통령에게 앞으로 우리 통일민주당이 취하게 될 정치 노선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이런 대목이다. 중간평가나 또는 내각책임제 개헌 문제는 국가 이익과 정치적 발전 차원에서 여야간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투쟁의 대상은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정계 원로 C옹의 등장이다. “내가 앞에서 그런 말을 안 했는가. 사람은 어쨌든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옛말 그른 데 없다더니 이것만은 진짜여. 어째서 그러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YS가 누구여. 좋은 말로는 소신의 정치인, 나쁜 말로는 고집 불통이여. 그런 데다가 YS가 그런 말을 한 때가 어느 때여. 노태우·김대중 밀약설에 정신이 없을 때여. 그 무렵에 YS가 제일 두려워한 것이 무엇인가.
노태우·김대중 밀약설이 발전해서 행여라도 민정당하고 평민당이 짝짜꿍할까봐 그것이 제일 두려웠어. 그렇기 때문에 선명 야당을 표명해서 통일민주당을 강경 일변도로 몰아왔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당의 이미지를, YS의 이미지를 백팔십도 뒤집어 놨느냐. 그래 가지고 겨우겨우 꺼져가던 노태우·김영삼 밀약설을 되살아나게 만들었느냐. 그러니께 말하지 않는가. 사람은 어쨌든지 오래 살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밀약설, 노태우·김대중 묵계설은 어떤 내용인가. 6공 청와대 Y비서관이다. “노태우·김대중 밀약설은 3월10일 두 사람의 청와대 회담 직후 모종의 타협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면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왜 이런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느냐.
여기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6공 최대의 현안인 중간평가와 관련한 김대중 총재의 변신이다. 3월10일 청와대 회담 이전까지는 그의 주장은 일관되게 중간평가는 반드시 실시해야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3월10일 청와대 회담에서 그의 주장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또 다른 진술이다. 통일민주당 정책위의장 황병태 의원이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그 해 89년 6월 YS의 소련 방문은 3당 합당을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된 데는 과연 어떤 이유가 있었느냐. 다시 말해 소련 방문이 3당 합당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 데는 과연 어떤 이유가 있었느냐. 첫째는 5월31일 노태우·김영삼 청와대 회담 때에 보여준 노 대통령의 필요 이상의 극진한 배려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의 대화 내용이다. “참, 나가 말씀을 안 드렸지요. 김 총재.” “무신 얘깁니까.” “나가 요새 정신이 이렇십니다. 지난번에 김 총재가 소련을 방문하는데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카는 얘길 듣고 나가 모든 조치를 다 취해놨십니다.
그것도 해당 부서에만 지시해서는 지원 범위가 한정될 것 같아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비서실장을 비롯한 전 수석들에게 얘기했지요. 각자 자기 분야에서 도와줄 일이 있으만 아끼지 말고 도우라.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십니다. 청와대 기둥 뿌리가 빠져도 좋으니까 김 총재가 모스크바에 가서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드려라.”
다시 황병태 의원의 진술이다. “당시 YS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의 밀월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우리 통일민주당을 따돌리고 평민당하고 밀착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전긍긍 불안을 떨치지 못했는데 이 날 청와대 회담을 통해 그렇지 않다카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노태우는 동교동을 버리고 상도동을 선택했다. 동교동과의 밀월은 중간평가 유보라는 단발성 유착일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YS로 하여금 3당 합당을 결심하게 한 요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6월1일부터 21일까지 소련을 방문하면서 보고들은 체험이었다. 이 체험을 통해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