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79년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던 김대중씨 (오른쪽)와 부인 이희호씨 | ||
당시만 하더라도 시국에 대한 재야나 지식인 계층의 주문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정치권에 대한 냉소와 비난은 있지만 건전한 비판과 기대는 이미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당시 3당 합당을 앞두고 한 월간지가 소개한 K대학 Y교수의 정치권에 대한 직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당면한 최대 정치 과제인 5공 비리 청산과 관련, 여야가 크게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 여당은 할 만큼 했다는 시각에서, 앞으로 대처해야 할 국가적 과제가 산적한 마당에 언제까지 과거지사에 매달려 국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야 3당 및 재야는 그 정도로는 미흡하므로 재수사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정경유착으로 표현되는 대기업과 권력 핵심간에 거래된 정치자금의 흑막 등은 기피한 채 몇몇 사람의 사적 비리를 수사하는 것으로 5공 청산을 마무리지을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치권이 가야 할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87년 6월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올바른 길을 선택한 바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노태우씨는 그때의 결단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제2의 6·29선언을 단행함으로써 5공 청산의 핵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을 성사시켜야 하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아름다운 한국 동산을 훼손한 5공의 토양을 바꾸고 가지를 치고 다듬는 역할을 맡은 정원사다. 치자가 정원사에 비유되는 것은 인류문명 발생 이래 늘 그랬던 일이다. 신은 에덴동산을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을 아담에게 맡겼다. 아담이 계율을 위반했을 때 신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몰아냈다. 셰익스피어는 역사극을 통해 영국의 왕을 정원사에 비유하였고 그 이후 왕이나 통치자는 국가라는 동산의 정원사로 비유된 것이다.
노 대통령도 치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이 위임한 정원사의 역할을 다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89년 초 정국은 그런 상황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야 3당은 여소야대라는 유리한 고지에서 정부 여당에 대해 5공 청산을 강력히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정부 여당은 역부족인 채 야 3당의 공세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여기서 진술이다. 6공 청와대 출신 L비서관이다.
“그 시점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5공 비리 청산과 관련해서 이중 삼중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우선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그 하나였고, 둘째는 1월24일 이른바 3김씨,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3자 회동에서 결정된 전두환 전임 대통령의 국회 청문회 증언과 5공 핵심 6인의 사법처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백담사측의 거센 항의가 있었다.” 한편 이에 앞서 87년 6월 마침내 6·29선언으로 김대중씨가 장장 7년 간에 걸친 정치연금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 전두환씨가 80년 당시 전역식의 사열대에서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는 모습. [81보도사진연감] | ||
김대중씨는 왜 정치적으로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됐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80년 5월 이른바 5·17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80년대 전두환과 김대중의 첫 만남은 언제쯤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다. 적어도 그 이전, 즉 10·26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김대중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잘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 그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었을까. 이 부분 증인이 있다. S대령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질 뻔한 것은 10·26사태가 일어난 지 약 한 달 뒤인 79년 11월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뻔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어쨌든 79년 11월, 정확히는 11월27일이다. 신민당 내 동교동계 핵심인 이용희 의원이 국회 예결위에서 김대중씨의 연금 해제 문제를 거론했다.” 이런 내용이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연금은 즉각 해제돼야 한다. 참된 국가 안보가 이루어지려면 국민 총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71년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해서 5백60만 명의 지지를 얻은 민족 지도자 김대중 선생은 안보적 차원에서도 연금이 해제돼야 한다. 만일 김 선생이 연금 해제 상태에 있었다면 ‘YWCA 위장결혼사건’과 같은 소란 행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다. 본 의원이 이 자리에서 김 선생의 연금 해제를 거론하는 것은 오늘 아침 김 선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얘기인가. ‘나를 이렇게 연금 상태에 둘 생각이면 그러지 말고 차라리 재수감하라고 전해 달라. 그렇게 하면 나 한 사람만 교도소에 가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인데 연금을 당하다 보니 식구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도대체 우리 식구들이 무슨 죄가 있으며 심지어는 비서들과 운전기사까지 바깥출입을 통제당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과연 무슨 죄가 있나. 오늘 국회 예결위에서 이 발언을 하게 되거든 이 문제를 꼭 좀 거론해 달라. 부탁이다.’
이용희 의원의 발언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분을 사면 복권하라,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면과 복권을 점진적으로 고려하더라도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연금 상태인 만큼 풀어줘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S대령의 증언이다. “당시 신민당 동교동계는 총재인 김영삼씨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해 5월30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가 이철승씨하고 당권 경쟁이 붙었을 적에 동교동계는 김대중씨의 지시에 따라 YS를 밀었다. 그래서 당 총재로 복귀했다. 그러자 공작정치로 이철승씨를 지원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씨를 연금 상태로 가두면서 족쇄를 채워버렸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금 상태가 10·26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고 있었는데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씨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거론을 안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만 표출의 한 방법으로 이용희 의원으로 하여금 예결위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도록 지시했던 것인데 이 발언에 대한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국회의사당 로비를 걸어가고 있는 이용희 의원을 의사당 소속의 한 여직원이 달려와 불렀다. “이 의원님, 이용희 의원님!” “날 불렀나.” “예, 전화 좀 받아 보세요. 아까부터 이 의원님을 찾고 있는 전화가 걸려와 있어요.” “나를 찾는 전화가. 누구한테서.” “모르죠. 말을 안 하니까. 어디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근데 좀 이상해요. 경상도 말씬데 어쩐지 군인 냄새가 나지 뭐예요.” “군인 냄새? 그렇다고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전화가 어디로 걸려 왔어….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전화 좀 퍼뜩 퍼뜩 받으소. 전화 한 번 받는 데 뭐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농담입니다. 나 이학봉입니다.” “이학봉? 잘 모르겠는데….” “어허 이거 안되겠구만.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입니다. 인자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습니까.” “아,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중령이 나한테 무슨 일입니까.” “다른 기 아니고 오늘 이 의원의 국회 예결위 발언을 보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 내하고 얘길 좀 해야겠습니다.”
“그 문제라면 어떤 문제 말입니까.” “어떤 문제는 뭐 어떤 문젭니까. 김대중 선생의 연금 해제 문제지요. 어쨌든 나쁜 얘기는 아니니까 지금 곧 맨하탄호텔 커피숍으로 건너오소.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8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5월17일 밤 동교동에서 체포되어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김대중씨는 그로부터 50여 일 뒤 현장에 나타난 이학봉 중령과 만나게 된다.
신군부와의 첫 번째 만남이다. “김대중, 아니 김대중씨.” “듣고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당신은 죽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요. 어째서 그런지는 잘 알고 있지요?” “모르겠소.” “몰라요?”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가 살아있어 가지고는 당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당신을 놔두고는 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죽어야 한다, 이렇게 말했어요.”
신군부와의 첫 만남, 당시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회상이다. “지금도 기억이 새롭지만 그때 남산 지하실을 찾아온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지난 2월 각서에 서명을 했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결국 오늘의 이 상황은 자초한 것이다.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처지가 됐다…. 이렇게 말이다.” 당시 이학봉 중령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게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당신들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다 죽인다는 말인가.” “그거는 다르지요.” “어떻게 다른가.” “내가 말한 것은 김대중이 당신에 한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와 확대해서 해석을 합니까.”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잠을 좀 자야겠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오.” 돌아누우려고 하는 김대중씨에게 이학봉 중령이 말을 걸었다. “아, 잠깐.” “또 뭐요.” “그런 말이 있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어쩌면 이 말이 당신에게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죽을 사람이지만 살 수 있는 길이 꼭 한 가지가 있어요. 혹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나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 퍼런 신군부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김대중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런데 한 가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
과연 살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