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 중동으로 출국하고 있는 현대건설 직원들. 당시 중동시장은 한국인에게 미개척 지였다. | ||
먼저 정주영의 중동진출 결심당시 심경에 관한 회고.
“그때는 오일쇼크가 국가는 물론 현대그룹 운영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을 때였다. 특히 ‘현대조선’의 위기로 인해 전체가 어려워진 ‘현대’를 살리기 위해서도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중동밖에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돈이 넘쳐나는 곳은 전세계를 곤경에 빠뜨리면서 신나게 기름 장사를 하고 있는 중동밖에는 없었다. 막대한 오일달러가 중동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시기를 놓쳐서는 안되었다. 누구든 하루라도 빨리 뛰어들어 발판을 만들고, 경제적 교류를 확대하고, 그 많은 재원을 상대로 무역을 열고 건설 시장을 개척하는 사람이 세계화 전략에서 이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한국의 경제구조에 대해 비교적 강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온 이필상 교수(고려대 경영학과)도 이 같은 정주영식 세계화 전략의 긍정론을 인정한다.
“정 회장과 같은 창업 1세대는 황무지같은 경제를 세계 12위권으로 끌어올린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기업가 정신을 발휘,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을 일궈낸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들 창업세대의 공이다. 산업화 사회의 창업세대가 갖고 있었던 도전과 개척의 정신, 과감한 결단력은 오늘의 정보화 사회의 사업가들도 반드시 본받아야 할 가치다.”
그렇다면, 오늘의 벤처기업가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벤처업체 정철흠 사장(야인소프트)의 실물경제적 측면에서 정 회장의 세계화 전략에 대한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선 지금의 한국 상황이 재벌창업주들의 무대였던 산업화 초기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정 회장과 같은 재벌1세들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건설 조선 자동차 중공업 등 국가 기반산업을 일으킨 공은 오늘날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의 기반기술이 외국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벤처기업가들이 소프트웨어 생명공학 반도체 등에서 자사 제품을 세계화하려는 노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시대상황이 달라졌다곤 하지만 재벌 창업주들의 기업 정신은 오늘날 벤처기업가들의 그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최근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벤처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청운동 자택 집무실의 검소한 모습은 벤처기업가들에게 큰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 회장의 이 같은 세계화 전략성공에 관한 보다 심층적 시각도 있다. 다음은 문화계 원로 이어령 전 교수(이화여대)가 인터뷰에서 밝힌 기업문화적 측면의 주장. 그는 이 인터뷰에서 정주영씨와 현대그룹을 포함, 한국경제의 세계화 경쟁력 문제를 문화적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다.
▲ ‘세계 최대의 역사’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 장의 정주영. | ||
▲한국인들은 문화지향적이다. 지연 혈연 학연이 중시되는 사회풍토 또한 정서와 감정이라는 문화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 탓이다. 문화가 제 역할을 하려면 문명이라는 ‘싸늘한 세계’와 융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문화라는 자양분을 동시에 키우지 못하면 영속할 수도 없고 경쟁력을 높일 수도 없다. 정주영씨가 현대 특유의 기업문화를 만들지 못했다면 사우디 주베일 항만 같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를 일굴 수 있었겠는가.
─정주영씨의 기업문화를 말했는데, 기업들은 어떻게 문화적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는가.
▲문화의 힘은 ‘매력’이다. 동시에 나눌수록 즐거움이 커지는 ‘체험’인 것이다. 물질이 제공하는 만족은 유한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주영씨도 문화를 평소 매우 좋아했다. 문화인식은 실제 오늘의 첨단시대에 기업경영과도 연결된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 컴퓨터는 원래 단순한 계산기였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통신과 게임 등의 콘텐츠를 만나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린 ‘엔터테인먼트’의 도구가 됐다.
컴퓨터는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체험’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컴퓨터는 ‘체험을 파는’ 기계다. 이렇게 보면 기업들이 나아갈 길은 자명하다. 소비자들에게 소프트 파워, 문화적 콘텐츠를 판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기업의 미래 비전에 대해 조직원들이 성취와 체험을 나눠 갖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 양질의 기업문화로 소비자와 직원들을 즐겁게 하면 그 행복이 기업에도 돌아온다. 요즘 말하는 고객감동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기업인의 자세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기업인들은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스스로 시장과 수요를 창조하려는 열정을 갖고 있다. 마치 시인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독자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기업인들은 제품과 서비스로 소비자들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기업인이 세끼 밥먹자고 그렇게 고단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창조적 열정이야말로 기업인의 자양분이다. 포드가 자동차를 대중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단순히 돈을 벌겠다고 그랬겠는가?
포드는 유럽귀족의 전유물인 자동차를 보다 싼 값에 가까운 이웃들도 타게 하겠다는 ‘열정’에서 그 유명한 컨베이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고용이 늘어나고 임금도 올라갔다. 그 결과 미국은 노동자가 자동차 구매력을 갖춘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됐다. 포드가 이 모든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세상을 한 번 바꿔보겠다’는 창조적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화 전략이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부의 편재는 심각하다. 어떻게 보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고 여러 갈래로 비뚤어진 경쟁양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니 정보화니 하는 단어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사회의 5분의 1만이 수혜계층이라고 해서 5분의 4 위주로 사회 시스템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2 대 8의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선 5분의 1이 5분의 4를 도와주고 지원해 줘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런 혼돈의 시대에 정부는 무엇을 해야하나.
▲1960년대에는 ‘잘 살아보자’는 프로젝트가 있었고 1980년대는 ‘민주화를 달성하자’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놀라울 정도로’ 국가 프로젝트가 없다. 10년 뒤를 내다보고 진행하는 대계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은 행복과 체험의 문화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이 즐거움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 사회를 구축해야 합니다.
정주영씨가 아무도 나서지 않고 주변의 반대가 많은 상황에서 중동진출을 결심, 근로자들과 한마음 한몸의 네트워크를 형성, 국부를 창출하는데 성공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이병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