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은 여든이 넘어서까지 주베일공사를 따낸 일을 일생일대의 작품으로 여길 만큼 긍지를 나 타냈다. | ||
“입찰 결과 발표를 하는 소회의실로 정문도 상무를 들여보냈는데, 그렇게 들어간 정문도는 3시가 돼도 나오지를 않았다. 정문도뿐만이 아니라 다른 회사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표가 지연되는 이유도 모르는 채 피가 마르는 2시간이었다.
나보다도 열 배, 백 배는 더 불안하고 초조했을 전갑원 상무가 결과를 조금이라도 빨리 알기위해 마침 입찰실로 들어가는 커피 쟁반을 따라 재빠르게 들어가더니 몇십 초도 안 돼 이내 쫓겨 나왔다. 그런데 쫓겨 나오는 얼굴이 허옇다 못해 퍼랬다.
‘틀렸구나.’ 커피 쟁반 꽁무니를 쫓아 들어갔다 쫓겨 나오는, 그 짧은 동안에 전갑원 귀에 들린 소리가 ‘미국 브라운 앤드 루트사, 9억4백40만달러’라는 한마디였다고 했다. 무참했다. 무릎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전갑원이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사라졌고, 내 옆에 있기가 민망하고 전 상무 걱정도 됐던 김광명도 전갑원 상무을 찾는다고 자리를 떴다. 연 잃어버리고 허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격이었다.”
그러나 입찰 결과가 발표되자, 이런 우려는 환호로 뒤바뀐다. “현대는 우리가 제시한 네 개 공사를 내역으로 한 주베일 산업항 건설을 9억3천1백14만 달러로 입찰했다. 모든 서류는 완벽하다. 특히 44개월의 공사 기간을 조건 없이 8개월 단축시키겠다는 제의에 감명을 받았다.” 사우디측의 최종 발표 골자였다. 그 순간에 관한 관계자 기억담.
“모두들 나쁜 조짐들에 기가 죽어있는데, 입찰에 들어갔던 정문도씨가 갑자기 날아갈듯 환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빅토리 V를 만들어 치켜 들고 입찰장을 뛰어나왔다. ‘됐습니다! 회장님. ‘되다니, 뭐가 돼?’정 회장이 물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가 우리 ‘현대’로 낙찰됐습니다!’고 그는 소리쳤다.
전갑원 상무가 잠깐 들어가 들었던 브라운 앤드 루트사의 9억4백44만달러는 해양 유조선 정박 시설에만 국한된 응찰 가격이었고, 그것은 무효 처리되었다고 했다. 그 때의 감격은 말로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갑원, 김광명씨는 소회의실 모퉁이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두 사람이 ‘역시 우리 회장이 귀신인데…’ 하면서 철철 울기까지 했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의 낙찰은 당시 최악의 외환 사정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우리 정부에도 낭보 중의 낭보였다. 우리의 사기는 정말 하늘을 찌를 듯했다.”
▲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의 야경. 낙찰가 9억3천만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이 공사를 따내면서 한국의 외환 보유액도 사상최고치를 기록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 ||
마지막 남은 입찰 자격 한 자리를 따낸 것부터 입찰 보증금을 만들어내느라 노심초사했던 과정, 전갑원의 애사심(愛社心)으로 당초 정 회장이 정했던 입찰지시 가격을 어기는 바람에 공사 자체를 날린 줄 알았다가 6천만달러를 더 벌면서 낙찰자로 반전되기까지, 이 이야기는 ‘한국재계 한편의 거사’로 오래토록 일컬어지고 있다.
정주영은 팔십을 넘기면서까지 이 ‘거대한 쾌거’를 거론하며, 자신의 인생과 이를 결부시키곤 했다. 그 요지는 ‘시간과 자본의 활용’에 관한 그의 인생관을 잘 보여준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베일 공사 낙찰은 지금도 잊지못할 내 일생일대의 작품이다. 지금 내 나이 어느덧 팔십을 넘어 중반을 코앞에 두고 있다. 오직 ‘일’에 빠져 사느라 나이 같은 걸 의식할 틈도 여유도 없는 과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또 나이라는 것에 별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언제나 내 앞에 놓여 있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무슨 일로, 얼마만큼 알차게 활용해서 이번에는 어떤 ‘발전과 성장’을 이룰 것인가 이외에는, 실상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나는 대단히 바빴기 때문에, 나이 대신 ‘시간’만이 있었던 일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베일공사같은 세계 최대 공사를 수많은 국제 유수의 기업들을 제치고, 우리가 따낼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하나도 자화자찬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조선소 건설 중 바다에 빠졌을 때 그때 그것이 내 명 (命)이었다면 그 후에 내가 해놓은 많은 일들이 ‘아예 있지도 않은 일’이었을 테니, 그때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어쩌다가 잠깐 하기도 한다. 그때는 서울에서 울산, 울산에서 서울, 다시 서울에서 울산, 그런 식으로 조선소를 건설하며 울산에서 반 자고 서울에서 반을 잘 때였다. 울산에서 잘 때는 새벽 4시면 숙소에서 나와 2시간 동안 현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한 바퀴 돌아보고 6시면 간부 회의를 소집하곤 했다. 이런 정신자세가 없었다면, 나와 현대의 세계적 도약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 ‘주베일 드라마’의 과정은 ‘산넘어 산’이었음을 각종 기록이 전한다. 현대그룹 관계자가 전하는 내용.
“정작 공식낙찰은 되었으나, 사우디 발주처에서는 어쩐 일인지 ‘네고(계약 이전의 협의)’를 언제 시작하자는 연락이 없었다. 경쟁 입찰에 실패한 경쟁업자의 에이젠트들이 왕족들을 동원, 방해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는 절대로 공사를 해낼 수가 없다는 등, 한국은 아직 후진국이고 현대의 기술, 자본, 경험이 아주 유치하다는 등, OSTT(외항 유조선 정박 시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 값을 써낸 것이라는 등, 현대가 도대체 해양 공사 경험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느냐는 식으로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발주처가 찜찜하게 생각한 이유는 역시 현대의 OSTT 시공 능력에 대한 불안과 회의였다. 사실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OSTT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더욱이 30미터 심해저 암반에 30미터의 기초 공사를 12킬로미터나 하는 난공사는 전혀 해본 일이 없었다.
마침 브라운 앤드 루츠의 깁슨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OSTT 부문을 하청하자는 이유였다. 브라운 앤드 루츠사와 현대가 기술 협약을 체결했다는 공문이 사우디 체신청에 접수되자 비로소 네고조차 않고 있던 그들이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선수금 받아내는 데도 서류 제출 후 30~40일이 예사 통례였고 특히 공사 선수금은 50일은 기다려야 했다. 더구나 발주처 관리들은 선수금 액수 사상 최대 2억 달러에 배가 아픈 것인지 고의적으로 지급 서류 서명에 늑장을 부렸다. 서류가 거쳐야 할 사무실이 30여 군데였고 서명해야 할 사람은 50여 명이었다.
7억리알짜리 단일 현금 수표를 받아내던 날, 외환은행장이 정주영에게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정 회장님, 오늘 우리나라 건국 후 최고의 외환 보유고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세계로, 세계로 뻗어가고 있었다.”
이병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