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에선 메모지 한장이면 통한다?
▲ 지난 10일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공천심사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연합뉴스 | ||
구태 정치의 유산으로 불리는 ‘밀실공천’ 논란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의 경우 세종시 문제로 인해 친이 대 친박 간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지방선거이기 때문에 양 계파의 ‘자기사람 심기’ 다툼은 공천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야 모두 대외적으로는 투명한 선거를 표방하고 있지만, 물밑에서 벌어지는 경쟁 과정을 지켜보는 정치권 관계자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과거 공천심사에 참여했던 관계자와 이번 지방선거 예비후보자들의 입을 통해 공천준비 및 심사과정의 다양한 뒷얘기들을 들어보았다.
심사내용 뭔가
공천심사위원회를 먼저 구성한 민주당은 이미 공천 접수가 시작되었고, 한나라당은 15일부터 선거관리위원회에 예비후로로 등록한 이들의 공천접수를 받고 있는데 향후 공천심사위원회의 심사과정을 거치게 된다. 서류심사에서는 학력, 재산규모와 형성과정, 범죄기록, 세금체납 여부, 자기소개서 등을 검토한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공천심사를 받은 적이 있는 한 여권 관계자는 “자기소개서는 형식적인 요식행위이고 범죄기록과 세금 체납여부를 집중적으로 검사한다. 금고형 이상의 형을 받았거나 비리에 연루되었던 전력이 있는 이를 탈락시킨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류심사과정에서 허위사실을 기재했을 경우 일일이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문제점이다. 실제로 예비후보자들이 범죄 사실과 같은 불리한 내용을 적지 않거나 축소해서 적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더구나 한나라당은 지난 2월 26일 비리 전력자에 대한 공천신청 기준을 완화해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최종심에서 형이 확정된 경우’를 ‘최종심에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로 바꾸어 재판 중이거나 벌금형을 받은 경우에도 공천 신청을 할 수 있게 된 것. 심지어 같은 당 의원들 중에도 당헌·당규가 변경된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들이 많아 과연 공천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우려스런 상황이다.
이러한 ‘기본적’ 심사 외에 서류심사에서 중요하게 판단하는 점이 당에 대한 ‘충성도’다. 이를 판단하는 주된 근거 중 하나는 바로 당 회비를 얼마나 냈느냐는 것. 앞서의 관계자는 “당 전산기록에 남아 있는 회비 납부 내역을 통해 확인하는데 많은 돈을 꾸준히 낸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과거 당적을 옮겨 다녔는지의 여부도 충성도를 판단하는 중요한 심사기준. 이 당 저 당으로 옮겨 다녔던 ‘철새정치인’이거나 두 곳 이상의 당적을 가진 경우, 두 개 이상 선거구에 중복 신청한 경우 등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어 면접 과정에서는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그 지역에 얼마나 살았느냐”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지역구과 지역주민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다. 또 “그 지역에서의 인지도는 어느 정도나 되느냐” “본인의 지지단체는 몇 군데나 되느냐” 등이 주된 면접 질문이다. 그러나 면접 이전에 이미 후보자가 ‘내정’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면접이 형식적인 과정에 그치는 수준일 때도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앞서 서류심사를 통해 예비후보들 중 반 정도가 통과하지 못하게 되는데, 서류상 특별한 문제가 없더라도 당내 계파 세력에서 밀리는 경우 서류에서 미리 ‘걸러지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실공천 여전?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는 지난 2월 2일 “밀실 공천제도를 환한 햇살 아래 내놓겠다”며 오는 6월 지방선거의 공천과정을 엄격하게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 선거와는 달리 ‘투명선거’를 강조하고 있는 정치권에서는 후보자 선정 과정에서의 각종 비리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각에서는 ‘낙하산’ ‘밀실공천’ ‘줄대기 공천’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얘기다.
밀실 공천의 배후로 고위 실세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의혹도 계속해서 제기된다. 이들이 공천심사위와는 관계없이 물밑에서 ‘밀실 공천’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요즘 여의도에는 (실세들에게) 줄을 대기 위한 은밀한 만남이 종종 이뤄지고 있다. (일단 연결만 되면) 이름 석 자 적은 메모지 한 장을 건네거나, 때로는 만날 필요도 없이 전화 한 통이면 끝나는 경우도 있다”라며 ‘밀실 공천’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했다.
여의도 A 빌딩이나 B 호텔, 여의도 인근 지역의 중식당 C 등이 그간 ‘밀실공천’ 장소로 애용돼온 곳. 하지만 요즘은 의원회관 내에서도 종종 이와 같은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오히려 의원회관에서 만나는 것이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과거에도 밀실공천으로 인한 파장은 적지 않았다. 지난 2000년 4월에는 대구경실련이 대구 수성구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상대로 처음으로 밀실공천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3월에는 법원이 당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가 당을 상대로 낸 공천효력정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밀실공천’에 대한 첫 위법판결이 난 바 있다. 지난해 9월에도 10·28 재보선을 앞두고 안산상록 을과 수원 장안 후보들이 밀실공천에 대해 반발하고 탈당하는 파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인 판결이나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잡음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이번 선거에도 각 계파 간 세를 결집하기 위한 밀실공천, 정실 공천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치열한 예선전
이번 지방선거에서 예비후보자들의 경쟁은 수십 대 일에 이르는 곳까지 있을 정도로 뜨겁다. 심지어 한 선거구에서 같은 정당의 예비후보가 10여 명을 넘기는 선거구도 많아 이들 사이의 눈치 싸움은 공천 관문을 뚫기 위한 치열한 전략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비 후보가 난립하고 있는 서울시의 한 구청장 한나라당 예비후보 캠프에서 일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우리당 후보만 열 명에 가깝지만 그중 서류심사에서 통과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는 3~4명 정도다. 친이계 1명, 친박계 1명에 당 주류 인사, 구청장이 지원한다는 소문이 도는 각 1명씩이다. 이미 참모진들의 머리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상대 측 선거준비를 돕는 인사들의 면면과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다. 사전 협상을 통해 구청장과 다른 자리를 두고 타협해 서로 ‘밀어주기’를 할 수도 있고 계파 후보 간에 또 다른 ‘거래’가 이뤄질 수도 있다. 유력후보가 없는 선거구에서는 이러한 수 싸움이 더 치열할 것”이라고 전했다.
세종시 문제로 친이 대 친박 대립구도가 격화된 한나라당의 경우 각 계파 간 예비후보들의 경쟁이 민주당보다 치열한 양상이다. 특히 친박계 예비후보들은 친박계 공천심사위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불리한 공천심사를 받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친박계 예비후보들 사이에선 “친이 측이 유리한 대선 지형을 만들기 위해 이번 지방선거에서 친박계를 최대한 고사시킬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시각에 대해 당 주류인 친이 측에서는 고개를 내젓고 있지만 친박계의 ‘생존율’ 또한 6·2 지방선거 한나라당 공천에서 짚어봐야 할 관전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