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도 ‘여혐’으로 보는 커뮤니티 “혜화역 시위 우리가 먹어야 한다”
지난 7월 7일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에 주최 측 추산 6만 명의 여성이 모였다. 사진=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 카페
지난 7월 7일 혜화역 거리에서 열린 제3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한 직접적인 분노가 표출됐다. 수사기관을 주로 겨냥했던 지난 1, 2차 시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는 시위 직전 문재인 대통령이 불법촬영 편파 수사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으로 “가해자가 여성이어서 더 강력한 수사가 이뤄졌다는 ‘편파 수사’ 논란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이날 시위에서 시위 주최진은 문 대통령의 발언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퍼포먼스가 끝나자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 “재기해”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재기해’란 남성연대 상임대표를 맡았던 고 성재기의 한강 투신을 희화화하는 표현이다. 극단주의 페미니스트(래디컬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자살하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주최진은 두 차례에 걸쳐 “우리 집회에서 말하는 ‘재기해’는 사전적 의미의 ‘재기하다’ 또는 ‘문제를 제기하다’를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페미니스트로서 ‘재기’ 하기를 바란다는 뜻과 ‘(편파 수사) 문제를 제기해 달라’는 의미해서 사용한 것이므로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 시위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제기(재기)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발언이 울려 퍼지자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주최 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발언의 파급력은 거대했다. 6만 명이라는 압도적인 수의 여성들이 모였다는 시위의 원 목적과 본질 대신 “대통령을 향해 자살하라고 외쳤다”는 논란만이 더욱 극명하게 불거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 사이에서는 “저런 극단적인 발언과 퍼포먼스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며 불편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색을 배제한다는 시위 초기의 모습과는 달리 반정부 노선으로 완전히 선회했다는 데에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다. 특히 극단적인 여성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커뮤니티 ‘워마드’에 대한 시위의 스탠스가 180도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1차 시위부터 꾸준히 참가했었다는 한 20대 여성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1차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피켓이 문제가 됐었다. ‘기회는 남자에게만 평등할 것입니다’라는 문구였는데 당시 회원들의 대다수가 반대했다”며 “반정부시위로 흘러갈 경우 언론과 야당에게 떡밥밖에 안 될 것이고, 그러면 여성들의 목소리가 또 다시 지워진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시위에서 정치색을 철저히 빼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1차 시위까지는 ‘워마드’ 등 특정 커뮤니티 또는 단체와 연관되지 않은 개개인이 모인 시위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사진=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카페
이어 “그런데 2차 시위부터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비판하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워마드처럼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서서히 물 위로 올라왔다”며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워마드에서 쓰는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워마드를 추켜올리는 글들이 우리 (시위) 커뮤니티에 게시돼 지지를 받고 있다. 이전까지 주최 측이 먼저 나서서 워마드와의 연관성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워마드 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강조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스탠스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워마드는 이미 지난 5월 ‘홍대 남자 누드모델 도촬 사건’ 직후부터 “혜화역 시위를 우리가 먹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던 바 있다. 이 사건의 피의자가 워마드 회원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시위가 촉발된 만큼 워마드가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위해 실제로 워마드 회원들은 여성 회원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돌며 워마드 이미지 세탁에 나섰다. 각 커뮤니티를 도는 회원들에게는 세세한 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문 대통령 지지층이 굳건한 커뮤니티에는 문재인 정부 이후 발생한 성 불평등 사건을 반복적으로 게시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 방식이다. 페미니즘 기류가 강한 커뮤니티의 경우는 워마드 내 페미니즘 게시물 가운데 표현이 과격하지 않은 글을 올려 지지를 받는 식으로 세를 불렸다.
지난 5월 1차 시위 직전 워마드에 올라온 ‘시위를 워마드가 먹어야 한다’는 글. 사진=워마드 캡처
워마드의 행동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일부 회원들의 회원정보를 털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예컨대 해당 회원이 이전에 문재인 대통령을 옹호하거나 남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글을 쓴 것을 공개하고 “남자에 미친 흉자(흉내+남자. 남성을 옹호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매도하는 식이다. 결국 회원이 호소 글을 지우거나 탈퇴하도록 만들고 계속해서 워마드에 대한 긍정적인 기류를 형성해 나간다. 이런 수법으로 ‘문파 회원’(문재인 대통령 지지 회원)들이 많았던 포털사이트 다음의 여성 커뮤니티 ‘여성시대(회원 수 72만 명)’가 최근 함락됐다.
워마드 측은 “워마드가 없었으면 혜화역 시위도 없었다”라며 “(타 여초 커뮤니티에) 추천을 많이 받은 워마드 게시물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며 집단행동을 취할 방침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합을 맞춰 현재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 커뮤니티에서는 워마드를 옹호하며 “시위 인원 6만 명이 모두 워마드로 불리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회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문제는 워마드가 페미니즘과는 별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워마드에서 박 전 대통령은 ‘햇님’으로 불리며 그의 탄핵이 ‘여혐’으로 인해 이뤄진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특히 이번 3차 시위에서 ‘무X(남성의 성기)탄핵 유X당선’ 이라는 피켓이 사용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성이어서 탄핵됐고, 문재인 대통령은 남성이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워마드의 주장이 더욱 부각되기도 했다.
한편 시위 주최진은 워마드 논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10일 “현재 정부와 접촉 중이며 여러 각도로 대화 중”이라고 밝히며 “이와는 별도로 우리 뜻을 관철하기 위해 시위를 지속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앞서 주최진은 2차 시위 직후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각 장관과 경찰청장이 참석하는 ‘몰카 현황 둘러보기’에 참석해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바 있다. 그러나 “실효성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위의 영향력에 편승한 1회성 ‘보여주기식 캠페인’”이라는 이유로 참석을 거절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