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여학생들 “민감한 개인정보 DB화 인권 침해” 지적…몇몇 대학 역차별 논란 속 폐지도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생리공결제’를 사용하기 위해선 자신의 생리주기를 전산망에 입력해야 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한국외국어대학교 페이스북 페이지
최근 한국외대는 2018년 2학기부터 ‘생리공결제 전산화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한국외대 총학생회는 지난 15일 교무처 면담보고를 통해 여학생들이 온라인상에 자신의 생리기간을 입력, 특정 수업을 체크해 공결 처리하는 전산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란 계획을 전했다. 총학생회는 “온라인상에서 필요 폼을 자동 생성시켜 따로 양식을 작성하는 번거로움을 없앨 수 있다”며 “생리 기간 외 생리공결제를 사용하는 악용사례도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생리공결제는 여학생들이 월경 통증으로 수업을 참석할 수 없을 시, 이를 결석이 아닌 출석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여성건강권과 모성보호 확대를 목표로 교육부에 관련 제도를 시행·보완할 것을 권고하면서 교육현장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국외대의 경우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지난해 2학기부터 생리공결제를 도입했다. 학생들은 생리공결 인정에 필요한 유고결석신청서를 작성, 이를 담당 교강사에게 제출해야만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다. 최근 총학생회와 학교의 방침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일부를 전산화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생리주기가 민감한 개인정보일 뿐더러 이를 전산망에 입력하는 것이 인권·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번 방침이 당사자인 학생들 동의 없이 결정됐다는 점에서 논란은 커지고 있다. 한국외대 재학생 A 씨는 “생리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침해”라며 “생리현상을 학교차원에서 전산화, 관리하는 것은 여성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인 방침”이라고 비판했다. 재학생 B 씨는 “전산화한들 악용 여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의문이 든다”며 “생리주기까지 학교에 알리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학생인권위원회 준비모임(학생인권위)도 학교와 총학생회 방침에 유감을 표했다. 학생인권위 관계자는 “그동안 인권감수성을 강조해온 총학생회가 사적 개인정보가 지닌 중요성·민감성 등에 무지함을 드러낸 것”이라며 “국가인권위가 밝혔듯 생리공결제는 여성의 건강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매월 일정치 못한 생리주기를 시스템화하는 것 자체가 합당치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학생 C 씨는 “생리주기가 불규칙한 사람은 매번 가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더 불편할 것”이라며 “항생제 복용만으로도 생리주기가 쉽게 뒤틀리는 여학우들을 이해·공감하지 못한 처사”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이러한 이유로 전산화 방침이 지닌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보여주기식 행정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국외대 총학생회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교무처 면담보고 결과 내용 일부.
총학생회는 어디까지나 생리공결제 사용의 편의성 제고를 목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안중헌 한국외대 총학생회 회장은 “‘생리기간’이라는 단어를 보고문에 잘못 사용해 오해가 생긴 것”이라며 “생리공결 희망일을 선택하도록 만들 계획이었고 생리주기 등 개인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 “생리공결제는 우리의 선거공약이었던 만큼 지난 4월 선거를 치르면서 학우들과 충분히 공유됐다고 생각했는데, 시행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민감한 사안들을 고려치 못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생리공결제 시행여부, 운용방식 등을 둘러싼 내부 갈등은 비단 한국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당 제도가 교육현장에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제대로 자리 잡은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각에선 생리공결제가 ‘여성의 건강권 보장’이 아닌 ‘여성의 특혜’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도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례로 성균관대학교는 생리공결제 시행 여부, 사용 가능 횟수 등을 모두 교강사 재량에 맡기고 있다. 성대 관계자는 “모든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병가의 일환으로 운용, 교수 재량에 맡기고 있다”며 “이를 명시적으로 운용할 경우 악용 사례가 늘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강대학교와 경기대학교는 학생들의 복지증진을 목표로 생리공결제를 도입했다가 돌연 폐지하기도 했다. 서강대 관계자는 “2007년 한 학기 동안 시범운영했지만 악용사례와 역차별 가능성을 우려해 바로 폐지했다”고 말했다.
여자대학교에서도 생리공결제가 자리 잡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서울권 6개 여자대학교 중 생리공결제를 도입·운용하고 있는 곳은 성신여자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등 3곳이다. 동덕여대의 경우 생리공결제를 도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생리공결제를 운용치 않는 서울여자대학교 관계자는 “총학생회가 4~5년 전에 해당 제도를 검토하긴 했지만 생리공결 처리 시 관련 근거 등을 입증, 확인하기 어려워 도입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생리공결제 도입의 필요성을 되짚어야 한다고 말한다. 윤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우리 사회의 학습권, 노동권 등이 모두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개편돼 있다 보니 여성의 신체나 인권 등이 좀처럼 고려되지 못한 결과”라며 “외국과 달리 국내에서 생리공결제라는 제도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여성 인권이 낮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생리는 임신과 출산의 연장선으로 출산휴가처럼 당연히 보호받아야 마땅하다”며 “생리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나타난다는 점을 인지해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대학가에선 고려대학교 등을 모범적인 생리공결제 운용 사례로 꼽는다. 고려대는 2007년부터 생리공결제를 시행, 유고결석계라는 명칭으로 이를 제도화하고 있다. 고대 관계자는 “생리공결이라는 명칭으로 이를 따로 운용할 경우 해당 제도가 일부 학생들만을 위한 것으로 비춰질 염려가 있었다”며 “생리도 유고결석계 일환으로 조부상, 여타 질병 사유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결신청은 학생들이 전산망에서 특정 수업을 선택하면 해당 교수에게 관련 내용이 자동 통보되는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