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없는 ‘절대악’ 양배로 강렬한 존재감…“어디에 나오든 보고 싶은 배우 되고파”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조차 온전히 자각하지 못하는 이 인물, 양배를 연기한 배우는 음문석(43)이다. SBS 드라마 '열혈사제'의 장룡을 비롯해 넘쳐흐르는 강렬한 에너지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는 영화 '호프'의 양배를 통해 그동안 익숙했던 자신의 장점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며 연기자로서의 평가까지 한 단계 끌어올렸다.
"오디션 때 감독님이 제가 충청도 출신인 걸 아시고 양배를 연기할 때 충청도 사투리로 대사를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연기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합격했다는 연락을 딱 받은 거예요. 점프하고 난리가 났죠(웃음). 나홍진 감독님 작품에 나 음문석이 출연한다고? 여기에서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심지어 대사까지 있다고(웃음)? 거기에다 영화 개봉 이후엔 봉준호 감독님까지 저를 언급해 주시다니! 그 영상을 백 번도 넘게 돌려보면서 마냥 행복해하다가 '야, 나태해지지 마. 너 지금 과대평가되고 있어'라면서 스스로를 다잡았죠(웃음)."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호프'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호포항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SF 액션 스릴러다.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을 비롯한 주민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와 맞닥뜨리면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번져간다.
양배는 이 서사의 출발점에 위치해 있다. 산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린 외계 생명체를 사냥한 그의 행동은 호포항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키지만 정작 장본인은 자신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죄책감도, 뚜렷한 악의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천진하고 태연해 보인다.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와 동떨어진 듯한 이 기묘한 태도는 양배를 단순한 악인보다 훨씬 불길하고 음습한 존재로 만드는 지점이기도 했다.

악의가 없는데 '절대악'이라는 설명부터가 모순적이다. 때문에 음문석에게 양배는 이제껏 맡았던 인물 가운데서도 좀처럼 기준점을 잡기 어려운 캐릭터였다고 했다. 선과 악 어느 한쪽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행동의 이유마저 쉽게 드러내서는 안 됐고, 그렇다고 단순히 기괴한 인물로만 표현하면 나홍진 감독이 요구한 양배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한동안 그 모순을 붙잡고 고민하던 음문석에게 예상하지 못한 해답을 준 것은 연기 교본도, 다른 영화 속 캐릭터도 아닌 어린 조카였다.
"양배에겐 어떤 특정한 색깔이 없어요. 주도적인 색이 없는 대신 복합적으로 뭔가 굉장히 많이 섞여 있다고 할까요? 어떤 방향을 잡고 연기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어린 조카가 위험하게 쪽가위를 갖고 노는 걸 봤어요. 아이 엄마가 뺏었는데도 웃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무섭게 느껴지더라고요. 동시에 '이거다, 이게 양배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적·도덕적 관념에서 벗어난 캐릭터이기에 어른으로서 어떤 선을 가지고 보는 순간 양배는 그 선에 걸릴 수밖에 없거든요. 아이처럼 아무 것도 모르니까 양배의 시선은 곧 아이의 시선이라고 생각해서 접근하니까 조금씩 답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완성된 양배의 가장 섬뜩한 지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명확히 그려내고 해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영화 후반부 외계인 전투원인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밴더 분)와의 추격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성기(조인성 분)가 일행의 차에 올라타고, 사람들이 안도와 승리감에 환호를 쏟아내는 순간 차가 크게 비틀거리면서 차창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던 성기는 도로 표지판에 부딪쳐 나가떨어지게 된다.

"'고양이가 튀어나왔다'는 그 말은 양배의 대사 중에서도 제일 고민이 많았던 대사였어요. 고민 끝에 마지막 결정에 도움을 줬던 건 '그 대사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양배가 행한 모든 것들이 걸리게 된다'라는 생각이었고요. 이 대사는 양배조차도 진실인지 아닌지 몰라야 해요. 진짜 고양이가 튀어나왔다고 믿어도, 반대로 고양이가 안 튀어나왔는데 성기를 죽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라고 믿어도 양배의 캐릭터성에 걸림돌이 되거든요. 양배는 확신이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니까요. 관객들이 보시기에도 이 친구에게 의도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판단이 갈리게 만들고 싶었어요. 이 신을 통해서 양배라는 캐릭터의 복잡성도 더 구체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결과 양배는 '호프'의 화려한 캐스팅 사이에서도 단숨에 눈에 들어오는 인물로 남았다. '열혈사제'의 단발머리 장룡부터 '범죄도시2', '육사오(6/45)', '모범택시3'까지 음문석은 독특한 외형과 강한 에너지를 가진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며 차근차근 이름을 알려왔다. 스스로를 남들보다 뒤늦게 속도가 붙는 '슬로 스타터'라고 표현해 온 음문석은 '호프'를 통해 쏟아지는 기대와 관심만큼 더 좋은 연기로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을 키우고 있다. 그 마음은 신인 시절 그가 그랬듯, 지금도 꾸준히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예전에 누나가 전화로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연습실이라고 답했는데 '너 한 번만 더 연습실이라고 하면 죽는다, 좀 나가라'라고 그럴 정도였어요(웃음). 하지만 저는 연기를 너무너무 오래하고 싶거든요. 제 개인적인 느낌인데요, 아마 내년에 뭔가 큰 게 하나 올 것 같아요(웃음). 그걸 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연습실에 나가야 할 거고요. 이렇게 더 많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면서 많은 경험과 노하우들이 쌓이게 되면 언젠가 사람들이 '저 작품에 음문석이 나온대. 봐야지'라고 말해 주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게 어디에 나오든지 보고 싶은, 저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