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 ||
1987년의 6월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기(氣)를 꺾고 나서 이른바 ‘6·29선언’을 이끌어 냈다. 그 해 8월, 경남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造船)에서 대규모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장승포읍 옥포관광호텔 앞 네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끝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시위 노동자 이석규씨(당시 21세)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8월22일).
노조 집행부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부산본부에 진상 조사와 이석규씨 부검 참여를 요청했다. 이에 국본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던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에서 거제도로 건너간다.
노 변호사는 당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일하는 한편, 국본 부산본부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부산·경남 일원의 6월민주항쟁을 이끌어온 주역이었다.
그는 8월23일 오전 옥포에 도착하여 노조 집행부(위원장 양동생)와 이석규씨의 장례절차를 협의하였는데, 특히 장지 문제는 유족들이 처음엔 화장을 원했으나 노동자들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강력히 주장하여 그대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노 변호사는 24일 오전에는 서울에서 온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마산지검의 이석규씨 부검에 입회하였다.
그런데 그 날 오후 유족대표라는 현역 육군 소령이 나타나 장지를 남원 선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 변호사는 25일 오후 2시경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유족들을 만나 “(장지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개인의 죽음으로 묻어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보아 달라”는 간청을 하였다. 그는 장례 전 임금협상 문제에 관하여 노조 집행부와 협의를 하였으나 특별히 개입한 바는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노 변호사가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장식(葬式) 방해,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라고 했다. 형법 제158조에 ‘장식방해’라는 죄명이 있기는 하나 그 조문을 적용해서 처벌한 전례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사문화된 ‘장식방해죄’를 갖다 붙인 것이 희한했다.
또한 (1)그 해 2월7일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한 고문조작 및 은폐규탄대회 (2)최루탄 사망자 이태춘씨에 대한 영결미사와 장례행렬 (3)그 해 6월28일 부산가톨릭센터 토론집회 등 묵은 사건을 이석규씨 장례문제에다가 얹어서 구속영장을 떼었다.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 조항도 끼워 놓았다.
노 변호사 구속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변협 진상조사단(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안동일 네 변호사)이 현지조사를 하고 온 뒤에 충무와 부산으로 향했다.
9월7일 충무서에 가서 이상수 변호사를 만나고 그날로 부산으로 가서 해운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노무현 변호사를 접견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가 구속영장에 기재된 것처럼 장례를 방해하거나 제3자 개입의 죄책을 질 만한 잘못을 범한 일은 없었다. 대한변협의 ‘조사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노무현 변호사를 어떻게 해서든지 구속하고자 하는 편집(偏執)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범죄사실화한 조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왜냐하면 노 변호사는 1981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 핵심인사 22명이 용공혐의로 구속된 ‘부림사건’의 변호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나선 이래 시국사범 변호,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2·7 박종철군 추도행사에 관련하여 부산지검은 노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아무런 증거 보완도 없이 네 차례나 법원측에 영장 발부를 종용한 사실이 알려져 비판을 받은 바도 있었다.
노 변호사는 10월29일 앞서의 구속영장 죄명(집시법위반, 장식방해, 노동쟁의조정법위반) 그대로 기소되었다(신병은 9월24일 구속적부심사에서 석방). 서울과 부산의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99명의 대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노 변호사 자신은 해운대경찰서에서 쓴 자필 기록에서 “나는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독재집단의 잔재들로 이루어진 정부의 탄압이 있고, 그 장단에 춤추는 검찰과 법원이 있을 뿐, 진실과 정의를 밝히려는 검찰도 법원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노 변호사와 같은 법률사무소 멤버이던 문재인 변호사는 변론에서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공소사실에 대한 구성요건 부합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각 행위의 사회적 의미 또는 사회적 정당성의 평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사건 집회·시위들은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시위가 아니었다. 또한 집회 신고의무가 있는 주최자도 아니었다”고 기소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장식 방해’의 점을 보면, 노 변호사는 장례 이틀 전인 6월26일 정오 무렵 현지를 떠난 후로는 일체 거기에 간여한 바 없었다. 현지에 가서 장례에 관한 의견 제시는 했으나 누구에게 강요한 바는 없었다.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행위도 없었다.
그러나 1988년 2월22일 부산지법은 노 변호사에 대한 공소사실을 유죄로 보고(다만 장지 결정 방해 부분 제외) 벌금 1백만원을 선고했다. 노 변호사는 항소했으나 1991년 7월에 항소를 취하했다. 그는 이 구속사건으로 전국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 이상수 | ||
1987년 8월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대우조선에서 발생한 노사분규에서 노사협의 결렬 후 농성·시위 근로자들과 진압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이석규씨가 경찰의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음은 앞서 노무현 변호사 구속 사건에서 본 바와 같다.
이 소식을 접한 서울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조문단을 보내기로 하고 민권위원장 이상수 변호사를 국본 간부인 김도현, 유동우씨와 함께 옥포 현지에 파견했다.
조문단 일행이 8월23일 옥포에 내려간 지 1주일 만인 31일 이 변호사가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에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보내어 사태파악에 나섰다. 나는 이 변호사와 함께 국본에 참여하여 6월 민주항쟁 때는 6월10일과 26일 두 번에 걸쳐 30여 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서울 도심지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거기에가 국본의 상임공동대표라는 입장도 있고 해서 9월7일 충무경찰서에 가서 이 변호사를 접견했다.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와 9월10일자 변협조사단의 조사보고서는 경찰의 구속영장신청서상의 범죄사실(훗날 검찰의 공소사실)과는 많이 달랐다.
9월18일자 마산지검 충무지청 검사의 공소장에 의하면, 죄명이 (형법상) 장식방해와 노동쟁의조정법위반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장식방해로 기소되기는 우리나라 형법이 시행된 후 첫 케이스가 아닐까 싶었다. 변호인단으로는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 안동일(이상 변협 진상조사단 참가), 김은집(대구), 이돈명, 한승헌 강명득, 하죽봉, 조경근(이상 서울) 등 10명의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공소사실 중 장식방해 부분을 요약하면 “망 이석규의 장례를 주관하여야 할 유가족들의 의사에 따른 장례절차 진행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망 이석규의 장식을 방해하고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장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한 일이 없었다. 8월24일 오후 노조 집행부와 이 변호사를 비롯한 서울·부산·마산에서 온 재야단체 인사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장례는 민주국민장, 5일장, 장지는 광주, 장례위원장 이소선(고 전태일군의 어머니)으로 확정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족측은 장례절차를 노조 집행부측에 일임하는 한편 보상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 변호사는 부산에서 온 노무현 변호사와 상의하여 이석규씨의 부검을 반대하는 유족과 조합원들을 설득하여 검찰의 부검 실시에 협조하였다(부검 입회도 하였음). 그런데 그 날 오후 이아무개라는 현역 육군 소령이 나타나 유족대표를 자처하면서 장지는 광주 아닌 남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유족측도 그와 같은 생각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처럼 장례, 장지 문제로 유가족측과 노조, 재야의 의견이 서로 맞서는 바람에 노조측도 갈팡질팡하다가 28일 오전 10시50분 장례위원회 주최로 유가족들이 불참한 가운데 이 변호사를 비롯한 국본 관련자 및 노조 주도하에 이석규씨 유해의 발인과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장례행렬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향하여 가던 중 오후 5시30분경 경남 고성군 고성읍 월평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경찰 15개 중대, 2천여 병력의 포위·제지를 받았다. 경찰은 영구차와 운구위원 차에 탄 노조원들을 모두 끌어내리고 유족 3명을 태운 뒤 경찰관이 영구차를 운전하여 남원으로 향하였다. 이 사태 속에서 이 변호사는 차에서 내려 경찰에 항의하다가 오히려 고성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충무경찰서로 이송되어 구속되었다.
소위 ‘제3자 개입’ 혐의에 대해서 보면, 이 변호사가 노동자들에게 조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조위원장이 발표한 6개항의 요구조건은 대우조선 노사분규의 조속한 타결을 돕고자 집행부에 권고한 것이었으므로, 이를 비민주악법인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으로 처벌할 사안은 결코 아니었다.
이 변호사는 기소된 후 한 달쯤 있다가 법원의 보석결정이 났으나 검찰이 이례적으로 즉시 항고까지 하는 등 끝까지 반발을 보였다. 결국 그는 구속된 지 49일 만에 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함으로써 석방되었다(그 후 사건은 검찰의 공소 취하로 끝남).
그는 그후로는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가 간혹 뜻밖의 핀잔을 먹곤 했다. “장식(장례) 방해로 구속까지 된 사람이 여기 오면 어떻게 하나? 또 무슨 방해를 하려고?”
압제와 분규로 절박해진 상황 속에서 변호사다운 역할에 충실했던 한 법조인을 이런 허황된 죄명으로 잡아넣던―그런 세상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