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 등 박근혜 맞춤식 핵심 콘텐츠 일부 조정 또는 제거될 듯
컨설팅업계에 따르면 CJ그룹은 최근 세계 3대 컨설팅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에 K-컬처 밸리 관련 전략 수립 용역을 맡겼다. K-컬처 밸리는 CJ그룹이 1조 7000억 원을 투자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에 만들 약 30만㎡(약 9만 평) 규모의 테마 파크다. 축구장으로 따지면 약 46개 크기다.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컨설팅 용역은 간혹 반대를 위한 반대 논리를 만들려고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CJ그룹 수뇌부 쪽에서 큰 관심을 쏟으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CJ그룹과 보스턴컨설팅그룹은 큰 도전을 맞았다. 테마 파크 사업은 생각보다 투자금의 빠른 회수가 어렵고 성공한 사례도 거의 없는 까닭이다. 세계적으로 월트 디즈니와 유니버설 외 테마 파크 사업에서 성공 가도를 달린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테마 파크는 놀이기구를 채워 넣은 놀이동산에 불과하다.
테마 파크는 놀이기구와 테마가 적절히 공존해야 지속적으로 방문객을 유치할 수 있다. 디즈니 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제외하곤 ‘테마’를 갖추고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롯데그룹과 삼성그룹은 각각 로티와 로리, 레니라는 테마를 선보였지만 ‘스토리 텔링’에 애를 먹어 단순 놀이동산으로 자리잡았을 뿐이다.
애초 CJ그룹과 창조경제추진단은 이런 전례를 탈피하려 놀이기구보다 테마에 집중했다. K-컬처 밸리를 역사관과 20세기 레트로관, Great K관, K-트로폴리스관, 신화관, 페스티벌관 등 6개관으로 구역을 나눠 차별화된 테마 넣기에 나섰다.
이제껏 만들어 낸 영화와 드라마, 예능을 철저하게 이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디즈니와 유니버설이 영화와 만화로 테마를 구현해낸 것처럼 영화 ‘명량’,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예능 ‘슈퍼스타 K’, ‘쇼미더머니’ 등을 테마 파크에 구현할 계획을 세웠다. ‘둘리’와 ‘뽀로로’, ‘터닝 메카드’, ‘대장금’, ‘태양의 후예’ 등 다른 회사에서 만든 콘텐츠도 도입할 요량이었다.
문제는 내부에서도 잡음이 일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 맞춤형 콘텐츠였다. 역사관에는 4D ‘명량’ 해상 전투를 놀이기구화하고 한반도 역사의 전쟁 승리와 위기 극복, 위대한 발명, 찬란한 문화예술을 배경으로 담을 예정이었다. 20세기 레트로관에는 새마을운동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급격한 산업화와 어려움을 극복한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담은 ‘국제시장’ 멀티 극장이 예정돼 있었다.
2015년 1월 28일 ‘국제시장’을 관람하려 영화관을 찾은 박근혜 전 대통령. 왼쪽부터 손경식 CJ그룹 회장, 박 전 대통령, 윤제균 감독, 배우 황정민. 사진=청와대 제공
‘명량’과 ‘국제시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CJ그룹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영화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2014년 11월 27일 손경식 CJ그룹 회장과의 독대 자리에서 “CJ의 영화·방송이 좌파 성향을 보인다”고 내내 불만을 표했다. 손 부회장은 이에 사과하며 “제가 모두 정리를 했다. 앞으로 방향이 바뀔 것”이라며 “‘명량’과 같이 국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화도 제작한다”고 말했다.
CJ그룹은 ‘명량’에 이어 ‘국제시장’을 내놨다. 2015년 1월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이산가족들과 함께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고 전해졌다. K-컬처 밸리 프로젝트는 이 때쯤 구상되기 시작했다.
재조정되는 전체적인 테마 파크 방향에선 이런 박근혜 전 대통령 맞춤식 콘텐츠가 일부 조정되거나 제거될 것으로 예상된다. CJ그룹이 국정농단의 중심 코드였던 문화융성 지우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까닭이다. CJ그룹은 2015년 2월 1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사옥에 설치했던 문화창조융합센터를 최근 닫기 시작했다.
문화창조융합센터는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기초로 마련한 ‘문화창조융합벨트’의 주요 거점 가운데 첫 단추였다. CJ그룹과 문체부가 공동 설립한 이 비영리법인은 CJ그룹이 설립과 운영을 맡고 투자유치와 지원 등에서 정부와 협업하는 구조로 운영됐다. 개소에 들어간 비용은 약 100억 원이었다.
테마 파크 사업이 쉽지 않은 사업이라는 재계의 관측이 뚜렷한 가운데 해볼 만하다는 긍정론도 고개를 든다. 여느 때보다 한류를 향한 세계적 관심이 집중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맞춤형 콘텐츠를 제거해도 즐길 거리가 풍부한 편이다.
20세기 레트로관의 경우 한국 특유의 원색적인 복고 문화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잘 맞물린다. 시리즈물이 유독 없었던 한국 콘텐츠 업계에서 ‘응답하라’ 시리즈는 유례없는 큰 인기를 누린 바 있었다. 추후 시리즈가 계속 나오면 테마 파크 콘텐츠 역시 새롭게 단장할 기초를 가질 수 있게 된다.
K-트로폴리스관에서는 로봇과 드론, 미래차 등 한국의 기술력을 뽐낼 수 있는 콘텐츠가 자리했다. 기아자동차와 협업도 염두에 뒀다. Great K관에는 VR과 4D를 활용해 K-팝과 뷰티, 음식을 소개할 수 있는 테마가 마련됐다. 세계인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잘 어울릴 수 있는 기획이란 평가가 나왔다.
한 문화계 인사는 “한국에는 의외로 롯데월드와 에버랜드 외에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테마 파크가 없다. 별 테마가 없는 롯데월드와 에버랜드가 잘 운영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며 “외부 기업과 잘 협업해 한국의 기술력을 보일 수 있는 장을 열고 CJ그룹만이 가진 콘텐츠를 잘 이용하면 좋은 테마 파크가 될 수 있다. 다만 기존 K-컬처 밸리의 기획에서 한국, 위상, 자긍심, 태권도, 한복, 전통, 유구한 5000년 역사, 극복이란 단어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CJ그룹은 미국의 테마 파크 전문업체인 헤테마 그룹과 함께 K-컬처 밸리 사업을 진행해 왔다. 월트 디즈니 출신으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랜디 프린츠가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약했다. 이어령 교수와 최준식 교수, 건축가 조민석 씨 역시 콘텐츠 관련 자문단 물망에 오른 바 있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