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 나섰지만 금융권 “이미 늦었다”…열악한 수익탓 전기차 수소차 시대 직격탄 맞을듯
정부가 고사 위기에 내몰린 자동차 부품업계에 대한 긴급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하자, 대뜸 금융권 관계자가 내놓은 진단이다. 시장의 상황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은 대책이라는 것. 자동차업계 1차 부품업체(밴더사)들의 붕괴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우려도 이어졌다. 그동안 현대차 등이 밴더사들의 수익 구조를 완전히 장악한 하청 관계를 오래 유지해온 탓에 스스로 자생력을 갖춘 부품업체들의 거의 없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 8000곳 달하는 부품사 줄도산 우려…정부 나선다
업계에 따르면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 정부 부처들이 자동차 부품산업 실태 조사 및 지원 대책 마련에 나섰다. 현대차 등에 부품을 납품하는 크고 작은 기업들은 모두 8000여 곳. 이들은 대부분 부산과 울산, 경남 창원 등에 집중돼 있다. 정부는 자동차 관련 부품 산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기부터 중장기를 아우르는 대책을 내놓겠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밴더사들의 연쇄도산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의 고질적인 ‘갑질문화’가 근본 원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인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산업부는 부품업체에 연구개발(R&D) 용도로 지원할 추가경정예산 300억 원을 확보했다. 또 내년에도 2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같은 목적으로 집행할 계획이다. 자동차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올해 말로 끝나는 개별소비세 인하 조치도 내년 상반기까지 연장하는 방안 역시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늦었다. 문제는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게 ‘금융권’의 공통된 시각이다. 실적 등 재무흐름으로 봤을 때 이미 위기는 현실화됐다는 것이다. 부산, 울산 기업 금융 담당자는 이 같은 정부 정책 추진에 대해 “지난해부터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진단했다. 정부의 대응책이 너무 늦었다는 비판이다.
실제 한 경제매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자동차업계 상장 부품사 82곳 중 25곳(30.5%)이 적자를 냈을 정도로 부품업체들의 경영난은 심각하다. 은행에서 빌린 돈마저 갚지 못해 부품사들의 연체율도 눈에 띄게 높아진 상황이다. 앞선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 산업은행이나 기업은행 등 비교적 기업대출에 관대한 금융기관들마저도 ‘핀테크’ 등 새로운 4차 산업에 대한 대출을 늘리라는 압박을 위에서 받는다”며 “실적이 악화되고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들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깐깐한 기준을 적용하라고 해서 가뜩이나 자금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밴더사들이 더 힘들어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 현대자동차 1차 협력사인 리한은 기촉법 종료 직전인 6월 말 워크아웃을 신청했고, 중견 부품사 다이나맥 등이 잇따라 회생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위기는 현실화되고 있다.
금융위원회 역시 이 같은 흐름을 모르는 바 아니다. 대책도 마련 중이다. 자동차 부품회사들의 연쇄 도산을 막겠다는 게 복안이다. 한계에 몰린 자동차 부품사들이 워크아웃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절차를 밟거나 공중분해되지 않도록 돕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앞선 금융권 관계자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8000여 곳에 달하는 부품사들의 ‘줄도산’은 이제 시작이다. 내년에는 더 많은 부품사들의 도산 뉴스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 현대차가 지배하는 구조 탓 ‘경쟁력 없어’
부품업체들이 부진에 빠진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의 고질적인 ‘하청 문화’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진단한다. 완성차 업체들이 1차, 2차 밴더사들 수익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고, 이익률까지 정해주는 통제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스스로 경쟁력을 갖춘 부품업체가 없다는 비판이다.
세계 최초로 공개된 현대차의 친환경 수소전기차. 자동차 산업이 가솔린, 디젤 엔진에서 전기차, 수소차로 바뀌면서 부품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부품사들 입장에서는 상황이 더욱 불리해진 셈이다. 박은숙 기자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매년 생산 원가가 얼마인지, 인건비가 얼마인지 등 완성차 업체들이 전부 파악한 뒤 정말 간신히 살아갈 정도의 수익률만 챙겨주고 비용을 후려치다보니 R&D에 투자해 미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밴더사들은 정말 손에 꼽는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산업이 가솔린, 디젤 엔진에서 전기차, 수소차 등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런 구조에서 부품사들에게 더 불리한 상황으로 연결됐다. 기존 엔진(가솔린, 디젤)보다 밴더사들이 납품하는 자동차 부품이 많게는 절반 가까이 줄기 때문. 앞선 관계자는 “내연기관 자동차부품 수는 2만~3만 개 정도지만, 전기차는 1만~1만 5000개에 불과하다”며 “전기차 같은 경우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전지도 LG화학 같은 대기업이 담당하지 않냐. 부품업체들이 입는 타격은 2배 이상”이라고 진단했다.
# 현대차…“더이상 전처럼 챙겨줄 수 없다” 선언
현대차도 변화를 읽고, 부품업체들과 선 긋기에 나섰다. 올해 초 핵심 부품업체 관계자들을 불러다놓고, “전처럼 챙겨주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는 전언이다. 앞선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초 현대차에서 주요 밴더사들 관계자들을 모두 불러서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일감을) 챙겨줄 수 없다. 알아서 기술력을 확보해 살길을 찾으라‘고 말했다더라”며 “수익률까지 일일이 정해주면서 밴더사들을 관리하더니 이제 와서 알아서 기술 경쟁력을 찾으라는 현대차는 물론, 그런 식으로 운영되도록 방치해 온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안재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