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주군 덕산면과 홍원군 운학면 사이에 있는 고개. 해발 450m. 이 고개는 덕산면과 운학면의 분수령인 웅봉(熊峰)과 봉화산(烽火山)의 기암절벽 사이에 있다. 함관령은 동쪽으로 홍원평야, 서쪽으로는 함흥평야를 흐르는 동성천강(東城川江)의 상류와 연결되어 있다. 민족의 지붕 개마고원의 험준한 끝자락이라 골짜기가 깊고 산이 거했다. 옛날부터 함흥과 원산을 잇는 관북의 중요한 도로여서 많은 시인들이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고구려의 도성 개경에서 동북 쪽으로 수백리가 떨어져 있는 함관령 영마루에는 수많은 기치창검이 나부끼고 있었다. 함관령은 밤새도록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새벽엔 빗줄기까지 무섭게 퍼부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이 빗줄기가 뚝 그치고 날이 쾌청하게 맑았다. 빗줄기에 씻긴 함관령은 초목이 울창하고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그 함관령에 수많은 기치창검을 나부끼고 있는 군사들은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의 군대였다. 그들은 동북면에서 여진족인 호발도군을 격파하고 대군을 이끌고 고려 개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관령에 이른 것이다.
이성계는 짙은 흑갈색의 오추마 위에 앉아서 홍원평야를 시린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정도전과 이성계의 장자 이방우가 시립해 있고 뒤에는 동북면의 맹장 이천계, 이지란, 조영규, 조영무와 이방과, 이방간, 이방원 같은 이성계의 아들들이 삼엄하게 포진해 있었다. 하나같이 눈빛이 사납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이었다. 군사들 역시 대부분이 동북면 출신의 가별치(加別赤:사병)들이라 위풍이 당당했다.
이성계는 입을 꾹 다물고 홍원평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 속에 웅지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성계는 지금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 몸을 단련하기 위해 사냥을 다니다가 불현듯이 행방을 감추고 백두산에 올랐었다. 언젠가부터 꿈 속에서 북소리를 듣고는 했는데 사냥을 하러 나오자 갑자기 북소리가 더욱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이성계는 북소리를 따라 백두산에 이르렀다. 백두산 천지에 있는 용왕담은 장군봉을 비롯한 다섯 개의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는데 호수로 내려가는 길은 화경(火頃 : 용암이 흐른 길목)으로 불리는 바위틈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성계는 바위틈을 통해 호수로 내려섰다. 여름철에는 사슴, 노루, 곰 따위의 짐승들이 내려와서 물을 먹을 뿐 인적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용왕담의 물은 북쪽으로 터져 있어 한참을 흘러내리다가 장백폭포에 이르고 다시 협곡을 이루며 흘러내려 송화강(松花江)에 이른다. 송화강의 발원지가 백두산 용왕담이었다.
이성계는 용왕담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청량한 기운이 몸속으로 퍼지면서 전신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용왕담에는 빗줄기가 뿌려지고 있어 사방이 잿빛으로 어둠침침했다. 산이 높아서인지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음지쪽으로는 아직도 잔설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이성계는 먼 호수를 응시했다. 호수의 수면에도 장중한 구름이 몰려오고 몰려가면서 차가운 빗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이성계는 다시 산정으로 올라왔다. 멀리 북쪽을 응시하자 아득한 하늘 아래 광활한 대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둥둥둥….
그때 이성계는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려오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잠을 자거나 꿈을 꿀 때마다 들려오던 북소리. 가슴이 뛰고 혈관의 피를 자맥질하게 하던 북소리. 그 웅장한 북소리가 백두산 천지에 이르자 더욱 세차게 들리고 있었다.
“우…!”
이성계는 북소리에 화답을 하듯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대륙을 향해 맹수처럼 포효했다. 그의 앙천성(仰天聲)이 하늘과 땅을 울리면서 대륙으로 퍼져갔다.
“장군, 서두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성계가 백두산 생각에 아득하게 잠겨 있을 때 정도전이 독촉을 하듯이 말했다.
“진군!”
이성계가 그때서야 긴 회상에서 깨어나 군령을 내렸다.
“진군!”
이방우가 이성계의 군령을 복창했다. 이성계의 진군 명령은 진중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랴!”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태조가 이를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서 죽이니 바꾸어 타므로, 또 쏘아서 죽였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가 있었다. 태조가 나하추를 몰아 쫓으니 나하추가 급히 말하기를,
“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이에 말을 돌리니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나하추의 휘하 군사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드디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해가 또한 저물었으므로 태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데 자신이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막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이성계의 무예는 조선역사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성계의 오추마가 홍원평야를 향해 질주하자 정도전과 이방우도 말을 휘몰아 뒤를 따랐다. 함관령은 순식간에 군사들의 말발굽소리로 천지가 떠나갈 것 같았다.
태조 이성계. 그는 고려 중기 무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후손이었다. 고려 무신의 난은 이의방이 워낙 하급 장교라 당시의 상장군인 정중부를 내세웠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불렸으나 실제로는 이의방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고려의 권력은 젊은 무신들이 장악했다. 이의방은 딸을 태자비로 시집 보내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으나 정중부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그의 집안은 전라도 전주에서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쿠데타의 주역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후손 중에 이안사(李安社)가 태어났다. 이안사는 자신이 사랑하는 기생을 안렴사가 강제로 수청 들게 하자 분노했다.
“내 계집을 빼앗는 안렴사를 용서할 수가 없다.”
이안사는 밤중에 관청에 침입해 기생을 불러냈다. 기생이 몸을 떨면서 나왔다.
“장군,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기생이 불안한 목소리로 이안사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지키려는 것이다.”
이안사는 안렴사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단숨에 목을 베었다. 안렴사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전주는 이 일로 발칵 뒤집혔고 이안사는 더 이상 전주에서 살 수 없었다. 이안사는 기생을 말에 태우고 자신이 거느리던 전주 지역 백성 170여 호(戶)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옛날 자신의 원수인 산성 별감이 안렴사가 되어 새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거느리고 동북면의 의주(宜州 :원산)로 이주했다. 이때 170여 호(戶)가 따라갔고, 새로 이안사의 영향력으로 들어온 삼척의 많은 백성들이 이성계의 뒤를 따라왔다. 고려는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임명하여 원(元)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했다. 이때 원나라가 침략하여 쌍성(雙城:영흥)에 진을 치고 이안사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했다.
이안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인 원나라 군대에 투항했고 두만강을 건너 오동까지 진출했다. 이안사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는 오동지역 몽고군 총사령관에게 친척의 딸을 주어 혼인을 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총사령관의 후원을 바탕으로 천부장이 된 이안사는 연해주 일대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고려민촌을 건설했다. 여진족들은 이안사의 세력이 커지자 위기감을 느꼈다. 이안사가 죽자마자 그들은 수천 명의 장사들을 동원하여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를 공격했다.
이행리는 황급히 돌아와서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가산을 배에 싣고 두만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기는 손 부인과 함께 가양탄(加陽灘)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았다. 그러자 들에 적병이 가득하고, 벌써 선봉 300여 명은 뒤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그때 물이 갑자기 백여 보가량이나 갈라져 이행리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를 같이 타고 적도로 들어갔다. 이행리의 종자들까지 바다를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합쳐져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했다. 북방 사람이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 하였다.
이행리가 적도를 향해 갈 때 갑자기 물이 줄어 모세의 홍해 바다처럼 갈라졌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다음호에 계속>